여행지 시장에서 산 시계는 곧 멈추고, 젓가락은 써보기도 전에 부러진다. 우리 기억이 그렇지 못한데 기념품에 무얼 바라겠는가. 타이 방콕의 야시장에서 단돈 150밧(약 6천원)에 파는 시계(왼쪽).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여행 인구가 늘어나고 사진 기술이 발전했다. 여행은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어쩌면 디지털카메라로의 기술 발전도 여행이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지금은 보기 힘든 슬라이드필름 케이스, 필름, 인화지를 넣은 앨범(오른쪽). 한겨레21 구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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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당신이 무어라 해도 나는 나대로 한다
편협과 억지, 좋은 말로 공감의 휴가 진검승부
알코올 VS 무알코올
주폭에 쫄지 마라
말이 필요 없다. 노상 마시는 거다. 오바이트 나오는 도시를 떠나 술을 부르는 피서지에서 술 안 먹고 뭐하려고 하는가? 처음 보는 이성과 짜릿한 급만남을 가지려는가? 그렇다면 더욱 마셔야 한다. 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미디어니까. 물론 그러다 술만 남고 이성은 떠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건 너님이 못나서 그런 거다. 술이 무슨 죄인가. 술을 멀리해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겠다고? 술 속에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었던 너님이 이제 와서 그 버릇을 개 주겠다고? 아서라~. 술도 못 먹고 안식도 못 얻는 수가 있다. 그냥 마시던 대로 마셔라. 인생 뭐 있냐, 마시는 게 남는 거다. 마시다 보면 여름휴가도 지나가 있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가 있고, 술 먹고 있는 자기 자신만 남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경험도 하게 된다. 주폭이다 뭐다, 까불고들 있는데 쫄지 마라. 고소당하지 않을 만큼만 마시면 된다. 고소하는 인간과는 다음에 안 마시면 된다. 마음껏 놀기 위해 지난 1년, 꾸역꾸역 밥을 벌지 않았나. 기다리고 기다린 여름휴가, 그대들은 알코올 속에서 살아 있으라. 싫음 말고.
X기자의 ‘와잎’
옆방 꽝꽝 두드리려고?
내 별명은 주모다. 술꾼이라는 소리다. 오죽하면 술집을 소개하는 책도 냈겠는가! 어깨춤 덩실덩실 추게 하는 알코올은 빡빡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탈출구다. 예전에 한 여자 선배가 밥보다, 야밤 남자와의 ‘사랑’보다 술이 더 좋다고 했다. 맞다.
하지만 1년에 딱 한 번 그 해방구를 씹다 버리는 껌 취급하는 날이 있다. 휴가철이다. 왜? 첫째, 휴가지 공기는 마음에 안 든다. 낯설다. 온 세포가 바짝 긴장한다. 허리띠 풀어놓고 마실 수 없다. 자연히 흡수율이 떨어진다. 술값만 더 든다. 마치 이런 거다. 부모님과 남편의 1200배 확대된 동공을 바르르 쳐다보며 마시는 것과 같다. 둘째, 평상시에는 만취해도 안전하게 서식지에 도착하지만 여행지 폭음은 호텔 옆방을 꽝꽝 두드리는 주폭질을 하거나 눈 뜨면 하늘이 반겨주는 상황을 만나기 십상이다. 지갑이 털리거나 섬으로 팔려갈지도 모른다. 셋째, 여행지 ‘섬싱’을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술이 오작교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오해다. 연애 안 되는 ‘놈’은 뭘 마셔도 안 된다. 그럼 뭐하냐고? 아인슈타인도 놀라 자빠질 특이한 음식을 찾는다. 제주도 꽁치김밥 같은 것! 폭탄주 15잔보다 오감이 취한다.
박미향 기자 한겨레 문화부
물건 사기 VS 안 사기 이것도 절반, 저것도 절반 해외 쇼핑은 패션상품에서 기호식품으로 변화 중이다. 홍콩에 가면 (일본) 세이부백화점에서 청바지를 착한 가격에 사고,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부드럽기 그지없는 가죽장갑, 가죽신발, 가죽벨트를 싸게 사는 즐거움이 있었다. 먹거리로 옮겨보니 색다른 흥겨움이 있다. 미국에 가면 코스트코다. 24병의 에일맥주 한 박스가 10달러고, 나파밸리산 와인 10달러짜리면 예술이다. 국내에서 먹어보기 힘든 술들을 저가에 맛보는 재미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올리브상점(Oliviers & co)과 마리아주 홍차가게를 간다. 진득진득한 발사믹 식초를 3만원에 산다. 뭘 발라먹어도 맛있다. 올리브는 맛보고 골라 산다. 홍차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인 마리아주 브랜드는 국내에서 구입 가능한 최하 가격의 절반에 살 수 있다. 수십 가지 종류의 홍차를 하나하나 냄새 맡아보는 것도 흥겹고, 희귀 선물용으로도 적당하다. 혹시 네스프레소 캡슐커피를 즐긴다면, 그것도 국내 구입가의 절반이다. 먹는 쾌감이 입고 바르는 거보다 좀더 세더라. 이성욱 씨네21북스 편집장 담배 한 보루면 됐지 이틀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행지에서 ‘질렀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던가. 최근 제주도에선 면세 담배 한 보루, 지난해 일본 오키나와에선 젓가락과 튤립햄 캔 1개, 7일간 머물렀던 타이에서는… 아예 없네. 그런데 여행을 가면 꼭 무언가를 사야만 하나? 옷이나 화장품이야 서울에도 널렸고, 세일이나 온라인을 이용하면 비교하며 저렴한 가격에 살 수도 있고, 술이야 먹을 일 있을 때 사면 되잖아. 선물용 담배 한 보루면 차고 넘치지. 지리도 잘 모르는 외국 어딘가의 쇼핑센터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물건을 산단 말인가. 난 그런 곳을 돌아다닐 시간에 차라리 시장을 구경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그 자체로 여행이 되고, 추억도 쌓이고, 맛있는 현지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그런 곳 말이다. 그 도시를 기념할 만하거나 그곳 아니면 절대 살 수 없는 물건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수피춤을 추는 인형을, 이탈리아 폼페이에서는 화산 폭발 전의 도시 모습이 담긴 책을 샀다. 지금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딘가에 처박혀 있지만 뭐 어때, 나에겐 명품 화장품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걸. 장인숙 씨네21 사업기획팀 팀장
사진 찍기 VS 안 찍기 나도 옛날엔 그런 사람이었다 일안반사식카메라(SLR)를 동생한테서 뺏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어언 몇십 년 전(으로 생각되는 때) 회사 때려치고 긴 여행을 갈 때의 첫 번째 준비였다. 슬라이드 필름을 20통 사고, 고민하다 10통을 더 사고, 외국에선 비싸다 싶어 일반 필름도 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흑백 필름을 선물로 받았다. 배낭은 사진기와 필름으로 반이 찼다. 물론 매뉴얼 모드로 찍었다. 배터리를 아껴야 하니까. 여행 중 카메라는 손에 착 감겨갔다. 초점을 맞춰 렌즈를 돌리는 손이 빨라졌다. 터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를 찍으려고 현지 카메라숍에서 삼각대도 샀다. 가방이 무거워져 거금을 들여 필름을 항공편으로 부쳤다. 여행은 확실한 적자로 돌아섰다. 고국에서 받아본 결과는 참혹했다. 그래도 인화한 걸 스캔받아 사이트도 만들었다. 웬 정성이냐, 뭔 부지런이냐. 나도 옛날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게 그 엉망인 사진이다. 내 주위에는 죄다 나만 믿고 카메라를 안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사진을 안 찍지만 보는 건 좋아해.” 나는 그들 추억에 고용된 노동자다. 구둘래 기자 그날을 현재로 새롭게 체험하다 바람 부는 제주도 바다가 아름답다. 친구들이 바다를 배경 삼아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 찍을 때, 나는 그들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걸 바라본다. 그렇게 나는 사진을 찍지도, 사진에 찍히지도 않는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내 의식은 바람 부는 제주도를 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 몸 밖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 어느 날, 바람 부는 서울 거리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제주도의 그날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 바다가, 바다 내음이, 친구들의 흩날리는 머리칼이 한꺼번에 내 의식 안으로 밀어닥치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바람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 불어오는 이 바람이 제주도에서 불었던 그 바람과 맞닿아 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게 불어오는 듯하다. 그렇게 그날의 감각이 모두 한순간 깨어난다. 사진을 찍어놓았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친구들은 사진을 보며 “그땐 참 좋았지”라고, 과거의 시간으로 그날을 추억한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현재의 시간으로 새롭게 체험한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 정은주 기자
차려 입기 VS 거지같이 여행에서 치마의 용도 “너 그러고 가려고?” “응, 왜?” “아니, 그래도 쓰레빠는….” 모친께선 슬리퍼를 신고 해외여행을 가는 나를 이해 못했다. 5년 넘게 신어도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이× 슬리퍼에 반바지, 책가방 크기의 백팩. 여행은 모름지기 가벼워야 한다. 동네에 마실 나온 듯, 시크하게 슬리퍼. 슬그머니 현지인화하기도 쉽다. 그래선지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현지인들이 길을 묻는다. 한국말로 나 중국말 몰라요, 여기 사람 아니에요, 말해도 어디 먼 지방에서 온 촌사람이려니 여기는 대륙의 풍모. 베이징 뒷골목에서 양갈비 골수를 빨며 옌징맥주를 마시는 ‘슬리퍼러’에게 바가지는 딴 나라 얘기다. 이런 나도 한번은 차려입고 일본 오키나와에 갔다. 9cm 힐에 아가씨 치마를 떨쳐입고 도쿄 나리타에서 환승하려는데, 입국심사대에서 정확한 한국말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보여달란다. 내 딴엔 ‘오피스레이디’풍이라 생각했는데 오 마이 갓, 불법체류 위험군으로 분류되고 말았다. 오키나와에 내리자마자 다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시장 바닥을 헤매고, 현지 음식을 사먹고, 술을 마셨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우민추’(오키나와 말로 ‘어부’, 오키나와 현지인을 뜻한다) 같단다. 에헤라, 바다는 파랗고 생선은 달고 취기 오른 목덜미로 부는 바람은 시원하다. 아가씨 치마는 다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는 날 새벽, 긴장했는지 비행기 놓치는 꿈을 꾸다 깼다. 황급히 시계를 보았다. 이륙 40분 전. 30초 만에 짐을 들고 튀어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보니 4시40분. 꿈 탓에 긴바늘, 짧은바늘을 거꾸로 읽은 것이었다. 나하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려는데 5시부터 6시까진 공항을 닫는다며 다 나가란다. 공항에서 쫓겨나자마자, 드라마인가? 갑자기 비가 내렸다. 캐리어를 깔고 앉아 졸고 있으려니 추웠다. 짐을 뒤지니 아가씨 치마가 나왔다. 도롱이처럼 뒤집어쓰고 공항 출입구에 기대어 1시간을 잤다. 내가 이걸 왜 입고 왔나 했더니, 이때 덮으려 했나 보다. 김송은 슬리퍼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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