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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19 14:52 수정 : 2008.05.19 14:57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달 22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에서 자신의 퇴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회견장을 나서다 직원과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윤종용 부회장 퇴진-‘원만한’ 이윤우 발탁 의외
재무 라인 전진 배치 전략기획실 영향력 여전
“자율경영 말뿐…이회장 친정체제 강화” 지적

“해체 선언을 한 전략기획실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지난 14일 삼성 사장단 인사 뒤 계열사 고위 임원이 독백처럼 한 말이다.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 유지와 전략기획실 부활을 대비한 사전포석이라는 성급한 분석도 나온다. 삼성 경영쇄신안이 발표된 지 한달이 지났다. 그동안 이 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사장단과 임원 인사가 단행됐고, 이번 주에는 조직개편과 보직 인사가 이어진다. 삼성이 ‘4·22 쇄신안’ 발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지난 14일 삼성 사장단 인사에 눈길이 쏠린 것은 새 경영체제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포석’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4·22 쇄신안’ 발표로 그동안 ‘이건희 회장-전략기획실-각사 전문경영인’으로 짜인 삼성의 ‘삼각 편대’ 중에서 두 축이 동시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이번 사장단 인사에서는 각 계열사의 독자적인 자율경영 역량 강화 등 경영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들이 예상됐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지난 97년부터 12년째 삼성전자를 지휘해온 윤종용 부회장이 퇴진하고, 대신 이윤우 대외협력담당 부회장이 들어섰다. 윤 부회장은 국내외적으로 삼성전자를 대표해온 전문경영인이다. 삼성전자 내 다른 최고경영자들과의 잇단 불화설이 부담이었지만, 회사 안에서 그의 퇴진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올해로 입사 40년째인 이윤우 부회장은 반도체전문가다. 지난 94년부터 반도체총괄, 기술총괄, 대외협력담당을 차례로 맡아왔다. 직전 보직인 대외협력담당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자리다. 퇴직을 준비하는 흘러간 인물로 여겨졌던 이 부회장의 발탁도 의외였다. 그의 강점은 원만한 성격이다. 회사 안에 특별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반면 카리스마나 강력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경영쇄신안의 취지를 살리려면 각사 자율경영역량을 강화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약화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이번 인사를 세대교체와 쇄신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과 윤 부회장은 비슷한 연배다. 이미 흘러간 물로 방아를 찧으려는 느낌마저 준다. 나머지 사장단 인사에서도 새 얼굴은 없다. 사장들이 자리바꿈을 했을 뿐이다. 삼성전자의 간판급 최고경영자들은 이번 인사에서 사실상 수모를 당했다. 물러난 윤종용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그의 공적을 생각한다면 상임고문직은 뜻밖이다. 삼성은 그룹 발전에 공이 많은 최고경영자 출신에게는 (실권 없는) 회장직 예우와 함께 사실상 평생을 책임지는 전통을 지켜왔다. 회장 비서실장을 지낸 이수빈 회장과 현명관 전 회장(현 상임고문)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출근거부 파동까지 일으키며 정보통신총괄에서 기술총괄로 자리를 옮긴 이기태 부회장은 대외협력담당으로 다시 밀려났다. 메모리반도체 신성장이론인 ‘황의 법칙’을 만들어낸 ‘스타 시이오(CEO)’ 황창규 사장도 비중이 떨어지는 기술총괄로 밀려났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사퇴 이후 그룹 얼굴로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라는 뜻밖의 카드를 꺼냈다. 삼성 안에서는 이윤우 부회장의 기용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목소리가 없고, 이건희 회장의 뜻을 거스를 위험성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이번 인사가 계열사별로 독자적으로 시행됐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삼성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지대섭 삼성화재,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 등 새로 발탁된 사장들도 그동안 이학수 부회장의 손발 노릇을 해온 재무라인 출신”이라고 귀띔한다. 삼국지에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일화가 있듯이, ‘죽었다던 이학수 부회장이 삼성 최고경영자들에게 확실한 힘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에버랜드 사건으로 유죄가 선고된 허태학 석유화학 사장, 박노빈 에버랜드 사장과 특검에 의해 기소된 최광해 전략기획실 부사장 등 고위 임원들에 대한 추가 조처도 없었다.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은 “실질적으로는 (이건희 회장과 전략기획실의) 친정체제 강화”라고 평한다. 삼성 경영쇄신안 발표 뒤 이건희 회장의 힘이 앞으로 약해질지 모르지만, 계속 삼성을 지배할 것이라는 대다수 외신들의 분석이 적중하는 것일까?

관심은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의 다음 ‘수순’이다. 향후 보직인사와 조직개편은 이들의 의중을 보다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가장 유력한 안은 삼성전자 안에 ‘작은 전략기획실’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삼성의 중심이다. 대부분 계열사의 지분을 갖고 있어, 자회사들의 효율적 관리를 앞세우면 컨트롤타워 기능 강화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조짐들이 벌써 보인다. 전략기획실 핵심 임원들 대부분이 삼성전자로 집결할 태세다. 삼성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장충기 기획홍보팀장, 최광해 재무팀장, 최주연 경영진단팀장(이상 부사장), 정유성 인력지원팀장, 김준 회장실팀장(이상 전무) 모두가 삼성전자행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이 연장선에서 보면 삼성전자 사장단 인사의 의미는 조금 더 분명해진다. 전자 안에 컨트롤타워 재구축을 위한 사전정비로 볼 수 있다. 삼성전자 사장단 중에서 유임된 인사들을 보면 이 구도는 보다 분명해진다. 지난해 자리를 옮긴 최지성 정보통신총괄, 박종우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을 제외하면 유임 인사는 최도석 경영지원실 사장이 유일하다. 삼성전자의 재무·기획·인사를 총괄하는 최 사장은 삼성 안에서 이학수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통한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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