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7 09:00
수정 : 2019.10.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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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DMZ 평화경제 국제포럼' 개막식에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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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한반도 교착상태’ 원인과 배경
대안은 선제적 ‘평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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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DMZ 평화경제 국제포럼' 개막식에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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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 있고 함대는 없다.”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심정을 묘사한 문장이다. 17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그의 유명한 책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평화 공존이 아닌 전쟁 행위를 선택하는 인간 본성적 유인 세 가지를 두려움, 명예, 탐욕으로 밝힌다. 16세기 임진왜란의 조선과 21세기 정전 교착상태의 한반도를 관통하는, 17세기 정치철학자 홉스가 주는 열쇳말은 무엇일까.
한반도 교착상태, 홉스의 덫
폭풍우 날씨가 끊임없이 내리는 비만으로 정의되지 않듯이, 전쟁 상태는 피아가 전투행위를 하는 시간만이 아닌 평화가 보장되지 못한 모든 시간으로 정의된다. 전쟁은 큰 비용을 수반하기에 평화 공존이 서로에게 득이 됨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신과 신뢰 부족은 평화 공존에서 벗어나 전쟁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 홉스는 “인간은 평화를 기대하는 한 그것을 추구하지만,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모든 수단과 이점을 추구한다”는 인간의 자연 본성을 밝히며 국제정치의 이런 특성을 ‘자연상태’로 정의한다.
즉, 자신이 상대방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깊은 적의를 갖고 공격할 가능성이 있어 무작정 수세적 태세를 푸는 것은 어렵다. 신뢰 부족으로 전쟁 상태에 놓이는 논리는 자신이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자신이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걸 상대방이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증폭되고 심화하는 서로를 향한 두려움이다. 이런 이치로 설명되는 전쟁 상태는 ‘홉스의 덫’(Hobbesian Trap)으로 정의되며, 필자는 한반도의 긴 정전 교착상태를 남북 사이 증폭된 두려움에 의한 홉스의 덫에 빠진 것으로 설명한다.
현재 한국 정부가 구상하는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는 한반도의 정전 교착상태, 즉 홉스의 덫에서 빠져나온 한반도를 상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착상태에서 벗어나 평화 공존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평화적 움직임’(Dovish Move)이다. 명절 전야 혼잡한 대형 백화점에서 사전에 만나기로 한 장소도 없이 서로를 놓친 부부가 다시 만나려고 한다면, 무작정 찾아헤매기보다 서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 기다릴 법한 장소를 찾아가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대안은 선제적 ‘평화 움직임’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덫에 갇힌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오려 한다면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평화 움직임으로 상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심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필자의 단순한 이론적 주장만이 아닌, 한반도 남북관계 70년사가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저서 <70년의 대화>에서 남북관계 70년사를 이렇게 기술했다. “수동적 접근은 주로 남북관계가 악화된 시기에, 능동적 접근은 남북관계가 개선된 시기에 등장한다. 한국전쟁 이후 이뤄진 대화 국면은 대체로 남한이 주도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구상되고 실현된 ‘햇볕정책’, 문재인 정부의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 구상, 그에 따른 대북정책 전략은 한반도를 전쟁의 덫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는 선제적이고 평화적인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선제적 평화 움직임은 상호 관계에서 강자가 취하는 공세적 태세다.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는 이런 정치경제학적 맥락에서 구상된다.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냉전 시기인 1962년, 쿠바 핵미사일 위기에 놓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메시지다. 한반도는 70여 년 동안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긴 교착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남북관계 70년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한반도에 데탕트(긴장완화)를 가져왔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이고 수세적인 대북 전략은 늘 한반도에 긴장을 불러왔다. 한반도의 긴장 심화는 대외 의존적 한국 경제에 직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고 전쟁 상태를 종결하는 것은 한반도와 국제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현재와 미래 세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므로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 구축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명한 시대 과제다. 물론 그 여정은 남과 북이 오랜 시간 서로에게 품어온 적의의 깊이만큼 험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와 용기를 갖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위한 공세적 태세다. 국제사회는 한반도에서 평화 공존을 향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한국에 지지와 협력을 보낼 것을 의심치 않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19년 8월28~29일 비무장지대(DMZ), 판문점, 서울 등에서 DMZ 평화경제 국제포럼을 열고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를 추구하는 우리를 향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인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DMZ 포럼 특별강연에서 한국 정부의 신 한반도 체제와 평화경제 구상을 높이 평가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책임은 모든 한국인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DMZ 포럼 개회사에서 “북한 핵과 군사적 위협은 일본에도 큰 문제이므로 한반도 평화 추구는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9년 가을, 한반도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한국과 북한뿐만이 아닌,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 때로 느슨한, 때로는 팽팽한 적의가 파도처럼 흐른다. 한반도에 흐르는 모든 적의를 가라앉히고 끝내 평화를 뿌리내려 신 한반도 체제를 구축하는 지혜를 모으는 데 필자의 작은 정치경제학적 고찰이 도움되길 바라본다.
박영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국제협력팀 부연구위원
yspark@kie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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