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산가만 ‘왕대접’ 돈 없으면 ‘푸대접’
제2금융·사채시장 전전 신용불량자로
“정부, 세제지원 제공등 대출유도해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철물점을 하는 박아무개(41)씨는 가게 한 켠에 방을 내어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지난 2002년 은행에서 3천만원을 빌려 어렵게 마련한 연립주택을 최근 경매로 날렸기 때문이다.
장사가 안돼 상환 원금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몇번 연체를 하자, 은행은 가차없이 집을 경매에 넘겨버렸다. 박씨는 “몇년 전 돈을 대출받을 땐 무슨 세일행사라도 벌이는 것처럼 제발 돈 좀 가져다 쓰라고 하더니 이제와선 경매처리는 본점과 연결된 전산시스템으로 자동 처리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만 했다”고 허탈해했다.
전북 전주시에 사는 이아무개(55)씨는 종이부채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하다가 지난해 부도를 내고 지금은 막노동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씨는 “부실업종은 무조건 돈을 회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해 가는 바람에 돈 줄이 갑자기 말라붙었다”며 “은행에서 조금만 도와줬으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숨지었다. 이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의 학자금 300만원을 대출받기 위해 최근에도 은행을 찾았다가 대출을 거부당했다. 결국 연 17%의 이자를 무는 할부금융사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 서민들 갈 곳이 없다=시중은행들이 돈 되는 고액 자산가들만 대접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푸대접하면서 갈수록 ‘서민금융 공백’이 커지고 있다. 은행들은 ‘일손만 많이 가고 돈은 안되는’ 서민들은 되도록 내쫓기 위해 각종 수수료도 비싸게 물리고 예금이자도 지급하지 않는 반면, 고액예금자들에게는 이자도 많이 쳐주고, 수수료도 면제해주고 있다. 우량고객에게는 이메일이나 전화 등을 통해 이자 감면, 부동산 투자 상담 등 각종 혜택을 내세워 귀찮을 정도로 대출 세일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돈이 필요한 ‘없는 사람들’에게는 갚을 돈을 몇번만 연체해도 경매통지서를 보내기 바쁘다.
10일 경매정보제공업체 디지털태인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진행된 46만4850건의 경매 물건 중 감정가 1억원 미만인 아파트와 연립·다세대주택 등 서민형 주택이 36만134건으로 전체의 77.5%를 차지했다.
고액 자산가들은 은행이 제공하는 각종 자산투자로 돈을 벌고, 은행에서 내몰린 서민들은 휠씬 이자가 비싼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을 전전하다가 다시 신용불량자가 되는 ‘자산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5억원이 넘는 은행권 고액계좌 금액은 지난 1998년 6월말 166조원이던 것이 지난해 6월말에는 370조원으로 123%가 늘었다. 특히 50억원이 넘는 저축성 예금 계좌수(지난해 6월말 기준)는 5억원 이상 전체 계좌 중 8.2%에 불과했지만, 금액으로는 절반 이상인 55%를 차지했다. 보험개발원이 최근 발표한 전망을 보면, 국내 상위 10% 부유층은 65만가구로 이들의 순 금융자산은 2004년 320조원에서 2008년에는 423조원으로 연평균 7%이상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반면 은행에서 이탈한 소액 자금들은 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등 제2금융권으로 몰려가고 있지만, 이들 금융권도 돈을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아 수신금리를 크게 낮추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6%이상의 예금이자를 지급하던 저축은행이 많았지만 최근엔 잇따라 금리를 낮춰 평균 연 4%대에 머물고 있다. 또 이들 금융기관은 매년 연체율이 급상승하면서 부실이 커지고 있는데다,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고 은행 돈을 대주주 개인의 사금고로 쓰는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도 여전하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이날 ‘서민금융체제 확립의 필요성’이라는 자료를 통해 “서민·중소기업 등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금융서비스가 과도하게 위축된다면, 이들 계층의 경제력은 회복기회를 잃고 계속 나빠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며 “이는 우리나라 경제 전반의 안정성을 훼손시키고 자본주의 발전도 방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대책은 없나=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서민과 중소기업의 자산축적이 어려워지면서 소득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이는 우리나라 경제의 발목을 붙잡는 주범이 되고 있다”며 “부유층 고객의 불법 외화송금 등을 차단하고, 은행의 서민금융 영업에는 세제지원을 해주는 다양한 유인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조복현 한밭대 교수(경제학)도 “미국의 지역재투자법처럼, 각 은행 점포들이 지역내 저소득층이나 중소기업과의 금융거래 실적을 공시하도록 해서 은행의 이미지와 영업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며 “은행들도 담보능력이 없는 저소득층도 상환능력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사후관리도 하는 등 스스로 서민금융을 담당하는 다양한 기술과 영역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현효 이화여대 교수(경제학)는 “우리나라에서 담보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 대한 금융이 취약한 이유는, 손실에 대한 적정한 보전장치가 없고 복잡하기 때문”이라며, “중소기업 등에 대한 소액대출은 정부가 70%까지 보증해주고, 서민금융 실적이 우수한 은행은 각종 우대혜택을 주는 미국처럼 시스템 자체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순빈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고리사채·카드깡 불법사금융 기승
최근 9달새 2배급증…대부업자 직장찾아와 협박도
|
||||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허가없이 불법 자금을 모집하거나, 연 66%를 넘는 높은 이자를 챙기고 폭행, 협박을 일삼는 고리 사채, 신용카드 할인 등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 집계를 보면 불법 신용카드 할인(깡) 적발건수는 지난해 1월부터 8월 중순까지 455건이던 것이 이후 9개월 동안 1107건으로 크게 늘었다. 또 고리 사채와 불법적으로 돈을 끌어들여 가로채는 유사 수신행위도 큰 폭으로 늘었다.
부산에 사는 이아무개씨는 지난 2월 인터넷에서 신용카드 연체 대금을 대신 갚아 준다는 광고를 보고 대출을 문의했다. 업체 쪽에서 결제 대금을 대신 납부하려면 카드가 필요하다고 해 우편으로 보내줬더니 카드로 1366만원의 카드깡을 하고 대납금 101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수수료 명목으로 가로챘다.
서울에 사는 유아무개씨는 지난해 12월 생활정보지 광고를 보고 대부업자에게 대출금 80만원을 1개월 만기로 받으면서 선이자 명목으로 20만원을 공제받은 뒤 60만원을 빌렸다. 윤씨가 만기일에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대부업체 직원은 사무실로 찾아와 상사에게 채무 사실을 알리며 협박을 하는 바람에 직장까지 잃었다.
금감원은 지난해 8월부터 불법 사금융 조사 활동을 벌여 2천여건의 각종 불법 혐의 정보를 수집해 경찰 등에 통보했다. 금감원은 “최근 들어 돈을 구할 데가 없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 사기가 빈발하고 있다”며 “피해를 봤을땐 반드시 경찰서나 국무조정실, 금감원 사금융피해신고센터 등에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