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conomy | 경제의 창
중국 ‘위안화 절하’ 미 관세 무력화
달러당 7위안 넘어서며 약세 기조
환율급등에 자금 빠져 나갈라
안정채권 발행해 방어 ‘양면전략’
미국 ‘환율조작국 카드’ 효과 적어
상계관세·완전변동환율 압박 전망
성과는 없고 재선길 바쁜 트럼프
수읽은 시진핑 시간끌기로 버텨
위안화 절상 ‘트럼플라자’땐 중국도 ‘잃어버린 20년’?
엔·마르크 절상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책실기 탓 버블 뒤 ‘장기불황’
중국 “실패한 전철 밟을 일 없을 것”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서 ‘트럼플라자’라는 조어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모여 미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해 엔과 마르크의 가치를 평가절상하자는데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 플라자호텔은 한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소유였다. 1988년 당시 부동산 재벌이던 그가 이 호텔을 사들였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면서 ‘제2 플라자합의’로 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종종 나왔다. 위안화 가치를 절상하는 ‘트럼플라자’가 이뤄지면 중국도 1980년대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에 빠질 수도 있다는 해석이 곁들여진다. 하지만 일본의 장기불황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의 거듭된 정책 실기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플라자 합의 이후 1년 만에 엔화 가치는 36% 상승했다. 엔화 절상 효과로 소비가 늘고 주식과 부동산 값이 상승했다. 일본은 미국 부동산 투자에도 열을 올렸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2년 만에 두 배 규모로 증가했다. 1980년대 말에는 고흐, 모네 등의 명화와 세계 최고급 골프장 회원권을 마구 사들였다. 미국을 밀어내고 일본의 시대가 오는 듯 했다. 엔화 절상에 따른 부정적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수출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내수를 부양한다. 일본은행은 1989년 정책금리를 5.0%에서 2.5%로 내렸다. 6조엔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시장에 풀었다. 이때 글로벌 핫머니가 일본으로 밀려들어 자산가격이 폭등했다. 거품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일본 정부는 반대로 고강도 긴축에 나선다. 금리를 3.5%포인트 올리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강력한 규제책도 내놓았다. 그러자 일본 증시는 붕괴됐고 담보 부동산을 팔아도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은 도산했다. 1993년 일본은 역성장(-0.6%)했다. 제조업 공동화까지 겹쳐 빠르게 불황이 찾아왔다. 다시 금리를 0%까지 인하하고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경기 부양을 시도했지만 돈을 빌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이다. 중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한광덕 선임기자 kdhan@hani.co.kr
일본 정책실기 탓 버블 뒤 ‘장기불황’
중국 “실패한 전철 밟을 일 없을 것”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서 ‘트럼플라자’라는 조어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모여 미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해 엔과 마르크의 가치를 평가절상하자는데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 플라자호텔은 한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소유였다. 1988년 당시 부동산 재벌이던 그가 이 호텔을 사들였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면서 ‘제2 플라자합의’로 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종종 나왔다. 위안화 가치를 절상하는 ‘트럼플라자’가 이뤄지면 중국도 1980년대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에 빠질 수도 있다는 해석이 곁들여진다. 하지만 일본의 장기불황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의 거듭된 정책 실기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플라자 합의 이후 1년 만에 엔화 가치는 36% 상승했다. 엔화 절상 효과로 소비가 늘고 주식과 부동산 값이 상승했다. 일본은 미국 부동산 투자에도 열을 올렸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2년 만에 두 배 규모로 증가했다. 1980년대 말에는 고흐, 모네 등의 명화와 세계 최고급 골프장 회원권을 마구 사들였다. 미국을 밀어내고 일본의 시대가 오는 듯 했다. 엔화 절상에 따른 부정적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수출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내수를 부양한다. 일본은행은 1989년 정책금리를 5.0%에서 2.5%로 내렸다. 6조엔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시장에 풀었다. 이때 글로벌 핫머니가 일본으로 밀려들어 자산가격이 폭등했다. 거품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일본 정부는 반대로 고강도 긴축에 나선다. 금리를 3.5%포인트 올리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강력한 규제책도 내놓았다. 그러자 일본 증시는 붕괴됐고 담보 부동산을 팔아도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은 도산했다. 1993년 일본은 역성장(-0.6%)했다. 제조업 공동화까지 겹쳐 빠르게 불황이 찾아왔다. 다시 금리를 0%까지 인하하고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경기 부양을 시도했지만 돈을 빌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이다. 중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한광덕 선임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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