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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강좌를 앞자리에서 듣기 위한 줄서기는 공무원행의 첫 관문. 수업시작 1시간 전인데도 이미 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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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은 물론 직장인도 가세
노동시장 왜곡, 민간-공공 부문 격차 줄여야
최근 경남 창원시가 실시한 환경미화원 공채에선 13명 모집에 108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8.3대 1의 높은 경쟁률이다. 당락은 30kg의 모래주머니 오래 들기와 윗몸 일으키기, 100m 달리기 등에서 판가름이 나지만, 고학력자도 상당수 가세했다. 전문대 졸업자가 13명, 4년제 이상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7명이나 포함된 것이다. 무엇보다 58살까지 정년이 보장된다는 점이 구직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환경미화원도 어엿한 인기 직종 반열에 오른 것일까.
극심한 취업난이 취업 준비생들은 물론이고 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까지 공무원행 열차에 오르게 하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가 지난 1월17일부터 28일까지 받은 9급 공무원 공채시험의 원서접수 마감 결과에 따르면, 2125명 모집정원에 17만8802명이 몰렸다. 평균 경쟁률이 84대 1인 데다, 인기직인 교육행정직의 경우는 경쟁률이 503대 1로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런 탓에 최근 노량진의 학원가는 신림동보다 더 뜨거운 고시 열기에 휩싸여 있다. 더 이상 5급 행정고시만 ‘고시’ 반열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7급은 물론이고 9급 공무원 채용시험 역시 ‘고시’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무원 시험 열풍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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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복도에선 그 다음 수업의 자리를 맡기위해 가방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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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6일 노량진의 ㅎ고시학원.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수험생들로 학원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강의실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복도에서 계단을 돌아 층층이 이어진다. 단과수업이 시작되는 오후 2시까지는 아직도 1시간 정도가 남았다.
“수백명이 듣는 인기 강좌를 앞자리에 앉아 듣기 위해선 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조금만 뒷자리에 앉아도 모니터로 교수님을 봐야 하는데, 그러면 집중력이 확 떨어지거든요. 서울에 올라온 이유도 없어지는 거죠, 뭐.” 지난 1월 대구에서 올라와 고시원 생활을 하고 있다는 서수민(가명·28)씨의 이야기다.
가장 힘든 일은 학원마다 오전 7시30분부터 1시간 정도 진행되는 무료 특강의 자리를 맡는 일이란다. 아침 특강은 일찍 일어나는 계기도 되고, 무료로 진행되기 때문에 수험생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노량진 고시촌 내에서도 인기가 높다는 이 학원 4층에 들어서 있는 ㄱ고시원의 한 관계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수험생들의 대부분은 자리를 맡기 위해 고시원 생활을 한다”며 “아침 특강의 경우 새벽 4시가 넘으면 이미 강의실로 내려가는 학생들도 있다”고 말한다.
오는 4월 국가직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팽팽한 긴장감이 학원 곳곳에서 느껴진다. 당장 수험생들은 막바지 시험 준비를 위한 문제풀이반 접수를 위해 어려운 관문을 거쳐야 한다. 접수는 온라인 접수와 직접 방문접 수로 나뉘는데, 온라인의 경우 통장개설 30초 만에 마감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결국 직접 접수증을 끊어야 하는데, 보통 하루 전날부터 줄을 서야 한다는 것. 9급 토목기술직을 지원할 예정인 강상우(가명·27)씨는 “최악의 경우에는 밤을 새워도 접수가 안 될 수 있어 불안하다”고 말한다.
2000년 이후 붐…9급 합격자도 대부분 대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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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원시험 준비생들로 북적이는 노량진 고시촌 일대. 이곳에선 학원, 식당, 서점, 고시원 등 모든 것이 공무원 취업 준비에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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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 열기는 지난 2000년 이후로 부쩍 높아졌다는 것이 학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ㅎ고시학원의 이우 총괄실장은 “많아야 700~800명에 불과하던 수강생들이 2000년 이후로 매년 10~20%씩 증가하더니 지금은 9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강생만 3천~4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한다. 이 학원이 2002년부터 인근 건물에 강의실과 자습실을 두세 군데씩 더 늘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최근 몇 년간 공무원 공개 채용시험 경쟁률을 들춰봐도 이런 분위기가 읽혀진다. 지난 2000년만 해도 37대 1의 경쟁률을 보이던 9급 공채시험은 2003년에 62대 1까지 올라가더니 지난해 90대 1로 치솟았다. 올해는 84대 1로 다소 주춤해 보이지만, 실제 합격자가 아닌 선발 예정 인원을 기준으로 해서 전년치(76대 1)와 비교하면 훨씬 높아진 셈이다.
전반적으로 하향 지원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급수가 낮을수록 평균 경쟁률 증가 추이는 훨씬 뚜렷하게 나타난다(표 참조). ㄱ고시원 관계자는 “신림동에서 5급 행정고시 준비하다가 짐 싸들고 노량진으로 와서 7급,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한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오랜 기간 시험 준비를 할 만한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7급보다 9급 공무원에 더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몰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우 총괄실장은 “과목수도 많고 시험이 어려운 데다 선발인원도 급격히 줄이고 있어 7급만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지원자들이 늘면서 합격선이 올라가고 있는 것도 하향 지원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나이와 학력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고행길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인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9급 공무원 공채시험 합격자 1798명 중 99.2%가 전문대 재학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있다. 더 이상 고등학교 졸업장으로는 하위직이라도 공무원이 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양광석 중앙인사위 인재채용과 서기관은 “특히 대학 재학 중인 24~26살 사이의 합격자 분포가 뚜렷하다”고 말한다. 대졸자가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학교 졸업 전에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에 통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대학서도 공무원 시험 물심양면 지원
일부 대학은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의 공무원 시험 준비를 돕는다. 교육훈련 지원금제도를 운영 중인 한성대는 전체 재학생을 대상으로 졸업시까지 100만원 한도 내에서 학원비의 50%를 지원한다. 박철우 한성대 취업정보팀장은 “매년 7억원 정도의 지원금이 나가는데, 공무원 학원수강신청이 많아지는 편”이라며 “얼마 전에는 노량진의 한 공무원 고시학원과 전체 온라인 강좌를 신청 학생들이 1년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협약을 맺기도 했다”고 말한다.
또한 지난해 명지대에선 공무원 시험 관련 강좌의 강사진들이 직접 캠퍼스로 출동해 재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 학원 관계자는 “학생들의 공무원 선호도가 높아지다 보니, 대학들도 경쟁력 높이기 차원에서 다양한 혜택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는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서수민씨도 그런 경우다. 지난해 6월 그는 3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기로 했다. 매년 체감경기가 악화되는 데다, 구조조정이라도 닥치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잘리지는 않을까 하는 게 주된 이유였다. 서씨는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공무원으로 특채되는 친구를 보면 일단 다녀보고 싫으면 나오라고 했는데, 지금은 도대체 무슨 빽으로 들어갔냐고 되묻는 형편”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매달 100만원이 넘는 돈을 고시원과 학원비, 용돈 등으로 쓰고 있다. 그나마 3년간 직장을 다니면서 저축해 놓은 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서미영 인크루트 경력개발연구소 이사는 “구조조정의 위기를 맞은 직장인들이 유학이나 창업에 비해 비교적 위험이 덜한 공무원 시험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수도권의 하위권 대학생들과 지방대생에게 있어 공무원 시험은 괜찮은 일자리로 가는 유일한 ‘비상구’로 인식되고 있다. 노량진 고시촌에서도 지방에서 올라온 수험생들의 비율이 전체의 60%를 넘긴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황우연(가명·24)씨는 지난해 6군데 대기업에 지원했지만, 한 군데도 서류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저는 몇 군데 넣어보지 않은 편이에요. 제 동기는 50군데나 넣어도 안 되더라구요. 그렇다고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 들어가기는 싫고, 차라리 공무원이 되자고 결심한 거죠.” 공무원 시험에선 학력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남대 토목공학과를 휴학 중인 강상우씨도 일찌감치 대기업 지원을 포기하고 공무원에 도전 중인 경우다. 강씨는 “민간 대기업과 9급 공무원직의 초봉이 1천만원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마흔을 넘겨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지원 동기를 밝힌다. 입사시 지방대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도 대기업 지원을 포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강씨뿐 아니라 그가 속한 학과에서 10명 중 4명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노량진 일대의 고시원수도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늘었다. 학원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장승백이역 근처까지 고시원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고시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서울에서 공부를 해야 붙는다는 생각에 지방 거주자들이 대거 상경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편의에 맞게 돌아간다. 인기 강사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 전문 서점이나 식당까지 학원 수강생들에게는 할인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서울 소재 수험생들이 많이 찾는 종로의 J행정고시학원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원의 이강산 상담실장은 “취업난이 지속되면서 상위권 대학 출신자들의 시험준비가 늘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수도권의 중하위권 대학 출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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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원의 상담실 풍경. 수업이 비는 시간에 수험생들은 학원 관계자들에게 각종 수험 정보를 문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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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상시 구조조정 체제, 공무원행 부채질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공무원 시험 열풍이 전체 고용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게 흘러나오고 있다. 우선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국가적으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여전히 평생 직장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한다.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가 2003년에 구직자 8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불황으로 인한 퇴사에 대한 두려움, 취업난의 해결책으로 공무원 시험이나 고시를 준비하고 있냐’는 질문에 61%(525명)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기업들이 상시적 구조조정 태세를 갖추면서 ‘안정적 직업에 대한 집착’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장을 옮겨다니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은 그만큼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또 “공무원 시험에 많은 구직자들이 몰리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중소기업”이라고 꼬집는다. 대졸 구직자가 급증하면서, 근무여건과 고용 안정성에서 뒤떨어지는 중소기업을 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소기업 지원을 통해 인재를 불러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지나친 불균형을 시정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적성이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공무원행을 택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고용 안정성만 믿고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종로의 고시학원에서 만난 수험생 구창식(가명· 25)씨의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난해 가을 학기에는 학교 수업과 학원 수강을 병행하다 보니 하루 15시간 강의를 들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아도 자기 소신을 갖고 합격 뒤에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냥 취업하고 보자는 식이죠.”
한편 9급은 최소 1년 이상, 7급은 2년 이상을 꼬박 시험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고시촌에선 중도 탈락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노량진 학원가의 한 관계자는 “강좌 개설 초반부터 10명 중 1명꼴로 탈락자가 나온다”며 “하루 12시간을 공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전한다. 그래도 초반 탈락자는 나은 편. 2~3년씩 해보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들의 취업전선은 더 암울해질 따름이다.
황보연 기자 hbyoun@economy21.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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