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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9 20:05 수정 : 2005.04.29 20:05

29일 오전 베이징대에서 특별강연을 마친 롄잔(왼쪽 세번째) 대만 국민당 주석이 이 대학 교수로부터 건네받은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들고 청중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롄 주석의 어머니는 1920년대에 베이징대 전신인 옌징대 종교학부를 졸업했다. 베이징/AFP 연합


■‘적대관계 종식 선언’ 의미

롄잔 대만 국민당 주석과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대륙-대만 사이의 적대관계 종식을 촉진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제3차 국공합작’ 시대가 열렸다. 롄 주석이 야당 지도자여서 두 사람의 공동보도문은 ‘촉진한다’는 ‘선언’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양안(중국-대만) 관계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 데 중대한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 새로운 ‘국공합작’의 출발=1차 국공합작(1923~27)이 ‘군벌’을, 2차 국공합작(1937~45)이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겨냥했다면, 3차 국공합작은 ‘대만 독립’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했다. 두 정당 지도자가 29일 공동으로 “양안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평화협정 달성”을 촉구하기로 함에 따라 지금까지 대만 독립을 추진해온 천수이볜 대만 총통 등 이른바 ‘녹색진영’(대만 독립파)은 주도권을 빼앗기고 협상 테이블에 등을 떠밀려 나오는 수동적 처지에 놓이게 됐다. 두 정당 지도자의 선언은 양안 관계에서 1991년 대만이 계엄법에 해당하는 ‘전시 비상 동원법’을 폐지한 이후 이뤄낸 최고의 성과라는 평도 나오고 있다. 91년 대만 장징궈 총통은 전시 비상체제 운영의 근거법인 이 법을 폐지함으로써 대만 민주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러나 대륙은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내놓지 않아 법적으로 볼 때 대륙과 대만은 아직 ‘내전 상태’라 할 수 있다. 롄 주석은 대만 정부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지도자는 이날 ‘촉진 선언’에 그쳤지만, 대륙이 대만에 대한 평화통일 의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양안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갈 것으로 전망된다.

두 지도자는 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고층과 기층 등 각급 정당 간부들의 상호 방문을 포함해 정기적인 교류 통로를 마련한다”고 합의한 뒤 “양안 동포의 절실한 이익”을 안건으로 논의할 것임을 밝혀 ‘제3차 국공합작’을 통해 이른바 ‘대만 독립 세력’에 대항한 국공 양당의 주도권을 이어갈 것임을 분명히했다.

‘당’ 대 ‘당’ 합의지만 중 평화의지 실려
양안무역 강화 ‘공동시장’ 우선 논의키로
‘하나의 중국’ 놓고 대만 정치세력 분열

◇ 양안 경제무역관계의 강화=이날 두 지도자의 합의를 계기로 중국과 대만의 경제 협력은 한층 활발해질 전망이다. 후-롄 두 지도자는 이날 △해·공로 직항 노선을 포함해 ‘삼통’(서신-인적-교통 왕래)을 개방해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대만 농산품의 대륙 판매 문제를 해결하며 △안정적인 경제협력 틀 마련을 위해 양안 협상 회복 뒤 ‘양안 공동시장’ 문제를 우선 토론하기로 합의했다.

양안 사이의 경제무역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서는 대륙과 대만 사이에 이견이 있어왔다. 공산당은 애초 대만과 홍콩·마카오 등 ‘1국2체제’ 실시 지역에 해당하는 ‘한층 긴밀한 경제무역 관계’(CEPA)를 맺을 것을 제안했고, 국민당은 ‘자유무역시장’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1국2체제’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고 공산당은 ‘국가 대 국가’ 관계인 ‘자유무역시장’ 안을 거부하기 때문에, 롄 주석은 이번에 그 중간 형태인 ‘양안 자유무역시장’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지도자는 “양안 협상 회복”을 전제로 ‘양안 자유무역시장’ 건설 문제를 우선 토론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 개념은 앞으로 양안 경제무역관계를 정의하는 새로운 틀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 대만 정치세력 분화 가속=3차 국공합작은 ‘대만 독립’을 공동의 적으로 겨냥함에 따라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지금까지 대만 독립을 추진해온 대만의 집권 민진당과 대만단결연맹(대련) 등 이른바 ‘녹색진영’이다. 이는 후 총서기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가령 후-롄 합의사항 가운데 “대만 농산물의 대륙 판매 문제 해결”은 민진당의 지지 기반인 대만 중·남부 농민들로 하여금 민진당에서 등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노림수라는 게 중평이다.

3차 국공합작은 대만 정치세력의 분화를 크게 촉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진당과 함께 ‘대만 독립’을 주창해온 대련은 천 총통이 “(대만 독립이라는) 이상을 저버리고 ‘하나의 중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민진당도 다음달 14일로 예정된 국민대표대회 선거 광고에서 “대련이 친민당과 다를 게 없다”고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국민당을 뿌리로 분화해 정치행보를 함께해 온 국민당과 친민당은 두 당수의 대륙 방문을 둘러싸고 대륙으로부터 얼마나 더 품격있는 대우를 받느냐, 어떤 양보를 얻어내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랴오다치 중산대 교수(정치학)는 이날 “지난 3월 대륙의 ‘반국가분열법’ 통과 이후 대만 정치세력이 즉각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며 “민진당과 국민당은 앞으로 더욱 복잡한 권력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만 독립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3차 국공합작은 대만 녹색진영의 분열을 촉진하는 등 양안 관계를 새로 규정할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본궤도에 오른 대만 독립추진 세력이 지금까지의 행보를 일거에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대만 정국의 정치투쟁은 새로운 양상을 띨 전망이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중국 공산당-대만 국민당 손잡고 1·2차 ‘외세 저항’ 3차 ‘양안 평화’

국공합작이란

후진타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롄잔 대만 국민당 주석의 29일 회담을 ‘제3차 국공합작’으로 부르는 이유는, 두 당이 과거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두 차례 협력 관계를 맺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제1차 국공합작은 지난 1924년 1월~1927년 7월 국민·공산 두 당이 ‘반제·반봉건’을 외치며 북방 군벌과 제국주의 열강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성사됐다. 당시 공산당원이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는 형식으로 협력이 진행됐다. 하지만 1927년 국민당 주석이던 장제스가 좌파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4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정부를 세우고 공산당을 불법화함에 따라 이 1차 국공합작은 결렬됐다. 이후 공산당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를 세우고 국민당과 10년에 걸친 국공내전을 벌였다.

제2차 국공합작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함께 맞서기 위해 성립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물러나자, 국민·공산 두 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 전면전을 벌였다. 결국 1949년 10월 공산당이 이겨 중국 본토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국민당 지도부는 대만으로 건너갔다.

지난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대만 국민당 정부에 중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다시 한 번 협력하자며 이른바 ‘제3차 국공합작’을 제안했지만, 대만쪽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후진타오 총서기와 롄잔 주석이 두 당을 대표해 다시 공동 목표를 달성하려고 손을 잡으면 60년만에 세번째 국공합작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번에는 공동 목표가 ‘양안 평화관계 구축’이라는 게 전과 다른 점이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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