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03 18:06
수정 : 2019.06.03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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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건’ 30돌을 앞두고 한 공안이 천안문광장에서 경계를 서는 가운데 사방으로 향한 감시카메라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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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30돌
천안문광장 경비 삼엄, VPN도 막혀
“1989년 정치적 동란 판단 이미 내려져
…이후의 안정이 옳았음 입증”
중 당국, 30년째 요지부동
천안문 기억 저장소, 홍콩 ‘6·4 박물관’
온갖 방해에도 박물관 관람객으로 북적
30년이 지나도 희생자 규모조차 확인 안돼
박물관 벽면 구호…“인민은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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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건’ 30돌을 앞두고 한 공안이 천안문광장에서 경계를 서는 가운데 사방으로 향한 감시카메라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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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문에서 장안대로를 따라 걸으면 베이징의 중심 천안문(톈안먼)에 닿는다. 30년 전 이 길을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갔다. ‘천상의 평안으로 가는 문’, 3일 오후 그리로 향하는 길은 막혀 있었다. 겹겹이 설치된 검문소가 관광객들의 발목마저 붙들었다.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삼엄한 표정의 공안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광장은 30년 전의 기억마저 비워낸 듯했다.
“1989년의 정치적 동란에 대한 중국의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이후의 안정이 당시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은 2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1989년 6월4일 새벽 천안문광장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뒤 지금껏 일관되게 유지해온 공식 입장이다. 중국 당국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마다 가상 사설망(VPN)을 통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한다. 같은 현상이 2일 벌어졌다.
“기억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 언론인 루이자 림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중국 사회의 ‘집단 망각’을 추적한 책 <기억상실 인민공화국>(2014년)에 이렇게 썼다. 중국 밖에서 이 사건을 상징하는 건 천안문으로 향하는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선 ‘탱크맨’ 사진이다. 정작 중국에선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더러는 알고도 고개를 돌린다. 30년째, 기억을 지우고 있다. ‘망각의 세월’이 흐른다.
베이징에서 지워진 ‘기억’을 2400㎞ 떨어진 홍콩에서 찾을 수 있었다. 1일 오후 홍콩 몽콕 지역의 낡은 건물 10층에 자리한 6·4 기념박물관의 30평 남짓한 공간은 50명 가까운 관람객으로 빼곡했다. 박물관에 올라가려면 건물 들머리에서 경비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서명까지 해야 한다. 박물관 활동가는 “압박을 느낄 텐데도 관람객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벽에 건 구호가 선명하다. “인민은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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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홍콩 몽콕 지역에 자리한 6·4 박물관을 메운 관람객들이 당시 학생들이 내건 ‘인민 지지’라고 쓰인 펼침막 등 전시품을 둘러보고 있다. 홍콩/정인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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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지우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투쟁의 결과다. 6·4 박물관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박물관 건립을 주도한 ‘애국민주운동 지지 홍콩시민연합회’(시민연합)는 1989년 5월 탄생했다. 천안문 시위 지지 집회를 열고 모금운동을 벌여 2200만홍콩달러(현재 환율로 약 33억원)를 베이징으로 보냈다. 30년 전 광장이 핏빛으로 물든 날 밤, 검은 옷을 입은 홍콩 시민 20만명이 추모 집회를 열었다. 30년째 이어지는 추모 촛불집회의 시작이다.
박물관 건립은 2012년 본격 추진됐다. 6·4 20돌을 넘기며 기억을 ‘저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임시 전시장을 전전하다 2014년 마침내 공간을 마련했다. 낯선 이들이 이유 모를 항의시위를 했다. 건물주는 계약 때와 용도가 다르다며 소송을 걸어왔다. 결국 2016년 7월 첫번째 박물관은 문을 닫았고, 2년 가까운 노력 끝에 올해 4월 새 박물관을 개관했다. 정체불명의 시위대가 다시 나타났다. 거짓 화재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하는가 하면, 밤사이 누군가 침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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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박물관 벽면에 1989년 당시 천안문광장에 세운 ‘자유의여신상’ 주변 시위대의 모습이 붙어 있다. 그 위 전광판 시계가 ‘6·4 학살 29년 362일 14시38분 54초째’를 지나고 있다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홍콩/정인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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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3일 밤 10시께, 계엄군의 장갑차가 바리케이드를 통과해 인간 띠로 막아선 시위대를 뚫었다. 인민해방군 301병원 당직 외과의였던 장안용은 ‘밤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무 수레에 실려온 총상자가 89명이었고, 7명이 숨졌다. 밤새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박물관 곳곳에 그날의 기록이 빼곡하다. 고교생 왕난은 광장 근처에서 계엄군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이 기증한, 그가 쓴 헬멧에는 이마 왼쪽을 관통해 왼쪽 귀 쪽으로 빠져나간 총탄 구멍이 선명하다. 그해 6월20일 베이징 공안국이 내준 ‘화장 허가서’에는 ‘바깥 활동 중 사망’이라고만 쓰여 있다.
“학교에서 물어봐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본토에서 온 선생님들은 묻는 것도 싫어한다. 아빠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다.” 까까머리를 한 아들(16)의 말에 아버지 청아무개(46)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카오에 사는 부자는 “홍콩 여행 온 길에 들렀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들만할 때 그 일이 벌어졌다. 솔직히 무서웠다”며 “잊어선 안 되는 일이라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감명 깊게 봤다.” 홍콩 청년 크리스 콴(31)이 손을 잡아끈 곳에 ‘5월 광주’를 기록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그는 “1989년 당시 갓난아기인 나를 안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30년이 지났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일한 공식 기록은 그해 6월6일 중국 국무원 대변인과 계엄사령관이 기자회견에서 “군인 5천여명과 시민과 ‘폭도’ 등 2천여명이 다쳤다. 사망자 300여명 대부분이 군인이며 대학생은 23명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유족 모임인 ‘천안문 어머니회’가 올해 3월까지 확인한 시위대 사망자는 204명이다.
베이징·홍콩/정인환 특파원
inhwan@hani.co.kr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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