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04 18:19
수정 : 2018.12.04 22:17
|
2017년 미국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벌어진 극우세력 집회 참석자들이 ‘유대인은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반유대주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럽인 중 25%, ‘유대인이 세계 분쟁에 개입’
2017년 트럼프 집권 전후 서구 반유대주의 확산
20세기초 유대인 박해는 세계화 불만과 대공황
2008년 이후 상황도 20세기초 상황과 유사
|
2017년 미국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벌어진 극우세력 집회 참석자들이 ‘유대인은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반유대주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2006년 7월 할리우드 배우 멜 깁슨은 음주운전으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당신도 유대인이냐”고 따지고, 조사 과정에서 “X 같은 유대인들이 세계의 모든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대계 자본이 막강한 할리우드에서 매장될 위기에 처했다. 그가 제작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유대인에 의해 박해받은 예수를 그렸다는 이유로 이미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던 중이었다.
2007년 미국의 대표적 현실주의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와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이스라엘 로비와 미국의 대외정책>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대외정책이 친이스라엘 세력의 로비에 좌우돼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곧 반유대주의 시각이라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월트가 재직 중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은 누리집에서 논문에 붙은 학교 로고를 지우는 이례적 조처를 취했다.
취중 실언이나 이스라엘과 관련된 학문적 비판도 미국에서는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 언행이 곧 사회적 매장을 뜻하던 미국과 유럽에서 다시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열린 극우세력 집회에서는 “유대인은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구호가 난무했다. 유대인 박해의 상징인 나치 문양과 그 구호인 ‘피와 땅!’이 등장했다. 올해 10월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에 백인 우월주의자가 난입해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한다며 총을 난사해 11명이 숨졌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반유대주의 참사다.
<시엔엔>(CNN)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유럽인들 중 25%는 유대인이 세계의 분쟁에 대해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20%는 유대인들이 언론과 정치에 지나친 영향력을 지녔다고 했다. 이 조사는 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스웨덴·폴란드·헝가리 등 7개국 7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응답자의 약 3분의 1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자신들의 현재 입지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난을 이스라엘 비판 봉쇄에 이용한다고 답했다. 20명 중 1명, 특히 18~34살 사이에서는 5명 중 1명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3분의 2는 유대인 인구에 대해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추정했다. 헝가리에서는 4분의 1이 세계 인구의 20%가 유대인이라고 답했다. 영국과 폴란드에서는 5분의 1이 그렇다고 말했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다.
|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미국에 본부를 둔 유대인 단체 반명예훼손연맹 집계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에 미국 전역에서 전년보다 57% 증가한 1986건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대학가에서 반유대주의 행동이 89%나 늘었다.
반유대주의가 범죄시되는 독일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2017년 의회 보고서를 보면, 독일인 9~10%는 전통적 반유대주의 감정을 지녔고, 50% 가까이가 옅으나마 반유대주의 편견을 지녔다.
반유대주의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2017년을 전후해 더 활력을 얻는 모양새다. 2016년 영국의 극우세력이 찬성 편에 선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가결됐고, 이듬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해에 프랑스에서는 극우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이 대선 결선에 진출하고, 독일에서는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총선에서 94석이나 얻어 제3당이 됐다.
서구 기독교 세계의 역사적 산물인 반유대주의는 2차대전 때 대학살 참화를 겪고, 미국에서 유대인이 주류 세력이 되면서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화 반대 조류가 부상하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반이스라엘주의가 겹쳐지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세계화에 따른 불평등이 심화되자, 극우 포퓰리즘 세력들은 세계를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매파’가 있다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 미국 언론·금융계·학계에 영향력이 큰 유대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에 극성을 부린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이 미국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진보 진영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이스라엘 책임론이 크다. 과거에는 박해받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박해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중동 분쟁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서구의 보수적 유대인들이 반이스라엘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해 원천봉쇄하려 한 것도 문제를 키웠다. 미어샤이머 교수 논문 사건에서 보듯,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극성스럽게 막으려는 시도는 유대인 일반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는다.
반유대주의와 반이스라엘이 착종되는 사태는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도 겪었다. 팔레스타인 지지를 표명해온 그는 2015년 노동당 대표가 되자 영국 유대인 사회로부터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영국 유대인 사회는 코빈의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코빈은 노동당에서 반유대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서구의 반유대주의는 예수가 유대인 때문에 죽었다는 담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유럽 기독교 세계에 동화되지 않은 것은 기독교도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중세 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천시되던 상업·고리대금업·통역 등에 종사했다. 자본주의의 발흥이 이런 분야 유대인들의 신분을 상승시켰는데, 이것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대인 박해의 배경이 됐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유럽 전역을 지배하려 한다고 선동하며 권력을 다졌다. 당시 1차 세계화 물결과 대공황에 지친 서구 대중은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데 적극 가담했다.
최근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커진 상황에서, 지위가 향상된 유대인들에 대한 질시는 20세기 초 유대인 박해 때의 환경과 유사한 면이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