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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9 17:07 수정 : 2019.10.30 14:29

28일 칠레 중서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한 시민이 할리우드 영화 <조커>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발파라이소/로이터 연합뉴스

중동·아시아·남미·유럽…민중의 개혁 열망 분출
신자유주의, 엘리트 정치 거부…각국 정부 ‘쩔쩔’

“하향식 공권력에 맞선 참여민주주의 사회혁명”
“GDP는 평균수치일 뿐 보통사람 삶의 질 가려”

28일 칠레 중서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한 시민이 할리우드 영화 <조커>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발파라이소/로이터 연합뉴스

만연한 불평등과 기득권 정치에 분노한 민중들의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몇 달 새 아시아와 중동에서, 남미, 유럽, 아프리카 대륙까지 세계 전역에서 거리를 점령한 시민들이 정부의 강경책에 맞서거나 유화책을 거부하며 근본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28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선 정부의 지하철 요금 인상이 촉발한 ‘민생고 시위’가 3주째 이어지며, 무한경쟁과 사회적 안전망 약화의 다른 말인 ‘신자유주의’ 반대 시위로 격렬하게 확산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지난주 수도권 일원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가 철회한 데 이어, 이날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지만 폭발한 민심을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이라크에선 부패 청산과 민생고 해결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와 정부의 강경 진압이 지난 1일부터 한 달 가까이 계속되면서, 28일까지 사망자만 240명에 육박한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날부터 야간 통금을 단행했다. 앞서 27일 레바논에서도 부패 청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열하루째 이어지고 학교와 은행들이 일주일째 문을 닫았다. 이날 레바논에선 수만 명의 시민이 수도 베이루트 남부 티레까지 손을 맞잡고 국토 전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70km 길이의 인간 띠를 만들며 연대 의지를 다졌다.

지난 27일 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순교자광장에서 민생고 해결과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레바논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고 있다. 베이루트/EPA 연합뉴스

지난 3월 ‘반송중(범죄인 송환 반대)’ 시위로 시작된 홍콩 시위는 ‘반중국 민주화 시위’로 번지면서 7개월째 사그라들 줄 모른다. 스페인은 카탈루냐 분리 독립 시위, 영국은 브렉시트 찬반 시위로 표출된 갈등의 골이 깊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각국 정부와 기업의 적극 대응을 촉구하는 시위도 지구촌 전역에서 끊이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양상과 내용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밑바닥엔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깔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전 세계에서 시위를 촉발한 계기는 다양하지만, 중산층 붕괴, 민주주의 억압, 변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시위의) 연료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네트워크에 힘입어 지식·정보의 위계 질서가 재편되고, 특정한 지도부가 없이도 불특정 다수의 대규모 시위가 가능해진 것도 20세기 권력구조에선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의 티에리 몽브리알은 <가디언>에 “전통적인 하향식 공권력 시스템이 갈수록 도전받고 있으며,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사회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짚었다.

래바논의 반정부 시위 참가자들이 할리우드 영화 <조커>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 <알자지라 플러스> 트위터 갈무리

상당수 나라에서 시민들이 올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조커>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조커 페이스’로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로 유명해진 시위대 단골 가면인 ‘가이 포크스 마스크’의 또 다른 버전이다. 영화 속 조커는 코미디언이 되고픈 소박한 꿈을 지녔으나 일상의 폭력과 기득권의 위선에 가로막혀 절망한 끝에 악한이 되어간다. 프랑스 역사 작가 윌리엄 블랑은 최근 <프랑스 24> 방송에서 “영화 <조커>는 정말로 도발적인 힘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경직된 정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영화 <조커>에서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듯, 세계 전역을 뒤덮은 시위도 객관적 수치로 구별되는 부유국과 빈곤국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빈곤의 종말>,<지속가능한 발전의 시대> 등을 쓴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경제학)는 최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에서 “프랑스, 홍콩, 칠레의 관리들은 대중의 정서와 겉돌면서 연료세 인상, 송환법 추진, 지하철 요금 인상 등 얼핏 온건한 정책들이 엄청난 사회적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는 걸 내다보지 못했다”고 썼다. 이들 나라는 전통적 기준에선 부유하고 경쟁력이 있지만, 정작 국민은 일상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삭스는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해당국 국민의 평균 소득일 뿐, 소득의 분배, 대중의 공정성 인식, 금융 취약층의 위기감, 정부 신뢰도 등 전반적인 삶의 질을 좌우하는 다른 조건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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