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도발 - 하 일본 우익의 역사적 뿌리는 19세기 후반 도쿠가와 막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존황양이’를 외치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우익은 군부와 재벌 등 일제 군국주의의 물리적 기반을 형성하며 한국의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을 감행했다. 국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군사파시즘으로 무장한 우익은 패전과 더불어 한때 물밑으로 잠복했으나, 미국의 점령통치·아시아전략과 맞물려 곧바로 화려하게 복권됐다. ◇ 보수본류의 정착=좌익 연립정권 출현 등 전후 민주주의의 격동기를 거쳐 1955년 보수세력의 대통합으로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구축됐다. 자민당 안에서는 온건보수와 우익 사이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전개됐다. 공직추방령 해제로 정계에 복귀한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가 전후 우익의 ‘원조’다. 극우성향의 하토야마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을 밀어내고 보수대통합을 일궈낸 뒤 평화헌법 개정과 자위대 국외파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의 노선을 이어받은 에이(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1957년 총리 자리에 올라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하는 등 한동안 우익이 득세했다. 그러나 안보조약 강행의 후폭풍으로 기시 내각이 붕괴하면서 온건보수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기시의 친동생),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어지는 온건성향의 파벌이 차례로 집권해 ‘평화헌법의 틀 안에서 소극적 안전보장’ ‘미-일 안보체제와 경제우선’이라는 보수본류 노선을 이어나갔다. 우익의 군국주의는 자민당 비주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무기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무기수출 3원칙’과 핵무기의 제조·보유·반입을 금지한 비핵3원칙 등 평화헌법의 정신에 바탕한 정책들이 잇따랐다. 50년대 하토야마·기시-80년대 나카소네 등
패전뒤 온건보수에 밀렸다가 최근 주류로
안보·역사·교육 발언 통해 ‘소장 우익’ 키워 ◇ 우익의 부활=82년 하토야마 노선에 충실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이 출범해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와 탄탄한 동맹을 맺고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우익의 세 확장 기도가 재개됐다. 그렇지만 총리로선 처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나카소네가 주변국 등의 거센 반발로 신사 참배를 중단한 데서 보듯이 우익이 체력을 충분히 기른 상태는 아니었다. 우익의 부활은 90년대 공산권 붕괴와 북핵 위기, 미국의 동아시아전략 변화로 촉발됐다. 96년 미-일 안보선언과 97년 미-일 새 방위협력지침, 99년 주변사태법은 일본을 미국 동아시아 안보전략의 군사적 파트너로 격상시키고, 미-일 동맹과 자위대 활동의 범위를 일본 열도 바깥으로 확장해 군사팽창의 길을 텄다. 우익이 활개칠 수 있는 이념적 공간이 대폭 확대된 것이다. 98년 8월 북한이 일본 열도 너머로 미사일을 쏘아올리자 일본 우익은 이를 사회 전반의 우경화를 위한 강력한 추진체로 활용했다.
또 93년 보수세력 분열로 인한 자민당 정권 붕괴는 오히려 민주당 등 야당으로 우익이 급속히 ‘세포분열’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정에 참여한 사회당은 몰락했다. 이어 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는 등 역사 뒤집기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했고, ‘잃어버린 10년’으로 대표되는 경제침체는 일본인들을 우익의 ‘강한 일본’ 구호에 빠져들게 했다. ◇ 주류로 올라선 우익=안보·역사·교육을 축으로 발호해온 우익은 21세기 들머리에서 마침내 온건보수를 밀어내고 정권을 쥐었다. 2001년 9·11 동시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02년 북-일 정상회담으로 터져나온 납치문제는 이들의 지배적 위치를 한결 공고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일본 우익은 군국주의를 탈색시키려는 미국에 대항해 자주외교를 주장하고 감성적 개헌을 외치던 50년 전의 우익과 뿌리는 같지만 훨씬 위험하다. 이들은 군국주의의 방패막이인 평화헌법을 바꿀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고, 전후 평화주의가 아니라 우익 국가주의가 일본에 만연해 있으며, 중국견제 등의 동아시아 전략에 일본을 교두보로 삼으려는 미국은 일본 우익의 든든한 지원세력이 돼 있다. 특히 전쟁과 과거사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여기는 소장 우익의 대거 등장은 국가주의 확산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일본 우익은 전후 60년만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거대한 괴물’로 변신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전범·망언 정치인 2세들 초당적 연대 자민·민주 두루 포진…‘새역모’ 등서 손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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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몰락…자민 온건보수도 추락
평화헌법 울타리 붕괴 ‘개헌’ 내몰려 일본의 전후 평화주의를 지탱해온 기둥은 사회당·공산당과 시민단체 등 이른바 호헌세력이다. 자민당의 장기집권체제에서 사회당 등의 의석은 자민당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혁 대립구도를 유지하면서 자민당의 과도한 우경화를 막고 평화헌법을 지키는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은 호헌정당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자위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기·국가를 용인하는 등 현실주의로 선회한 사회당은 93년 자민당 정권 붕괴 이후의 격변기에 자민당 온건보수와 연립정권을 창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중도세력의 확장이 아니라 두 당 내부에서 이념적 분열을 촉진시키는 ‘죽음의 키스’가 되고 말았다. 자민당에선 연립정권의 과거사 사죄와 대북 쌀지원 등에 반발한 우익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사회당에선 노선수정을 둘러싼 대립이 폭발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함께 호헌세력의 ‘맏형’인 사회당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어 자민당과 색채가 비슷한 보수정당인 민주당이 이전 사회당의 자리를 빼앗아버렸다. 호헌정당의 몰락은 21세기 들어 한층 가속화해 현재 중의원 전체 의석 480석 가운데 공산당은 9석, 사회당은 6석을 지키는 데 그쳤다. 이는 사회 분위기와 외부환경 변화의 탓이 크지만 호헌세력의 분열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다. 사회당 출신의 민주당 좌파는 ‘리버럴의 모임’을 형성해 개헌반대 운동을 펴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자민당의 온건보수는 파벌중심의 구태정치에 안주하다 각종 부패추문에 연루돼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언론의 우경화 현상도 뚜렷하다. 우파 〈요미우리신문〉은 스스로 개헌안을 내놓을 정도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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