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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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개인주의’ 을 위하여 |
사람들이 운동선수들을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싸우는 ‘전사’로만 생각할 때 그 운동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는 주체로서의 선수 개인은 자취를 감추고, 경기 결과에 따라서 국민영웅 또는 지탄 대상이 되는 객체적 관람 대상만 남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에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매우 듣기 껄끄러운 표현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사회는 많이 변했고, 이제 각 개인은 집단에 매몰되어 억눌렸던 자신의 지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개인의 가치를 발견해가는 시도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 주변에서는 집단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에서 경기를 하면 ‘조국은 너를 믿는다’는 식의 응원 구호가 내걸리고, 선수들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제 한 몸 불사르는 이른바 ‘태극전사’가 된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보이는 분야는 대체로 비인기 종목이고, 올림픽 기간 동안 세인의 ‘반짝관심’을 받을지라도 대회가 끝나자마자 그 선수들은 다시 무관심과 홀대 속에서 생활을 한다. 이런 사실은 열광과 환호가 단순히 경기와 선수 자체에 대한 선호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선수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개인적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 좋은 성적을 거둬 소속 팀과 나라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사명감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국가홍보대사’나 ‘국위선양사절’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 선수들을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싸우는 ‘전사’로만 생각할 때 그 운동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는 주체로서의 선수 개인은 자취를 감추고, 경기 결과에 따라서 국민영웅, 또는 지탄 대상이 되는 객체적 관람 대상만 남을 뿐이다.
얼마 전에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제대로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던 한 여고생이 퀴즈 프로그램에서 우승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사를 보며 그 주인공은 사회의 뒤틀린 구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빛을 발한 아름다운 개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 고교 동문들끼리 나와 단체로 문제를 푸는 퀴즈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그 프로에 나오는 학교는 대개 ‘명문고’로 불리는 학교였고, 그 졸업생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모교의 이름을 걸고 문제를 풀고 있었다. ‘퀴즈 프로는 배경보다는 실력으로 승부를 겨루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한 승부의 장’이라는 기존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별 이름 없는 학교를 나온 사람은 퀴즈 프로에 나올 수도 없는가’란 생각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하면 괜한 피해망상, 기우, 침소봉대일까.
인간은 다른 사람과 얽히고설킨 관계의 틀에서 자신을 규정해 나가고 다른 사람과 무리를 이루어 사는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누구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조심리나 유유상종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의 본능까지 무시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 절도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인간의 특성일지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는 것은 응당 경계하고 막아야 한다.
집단주의가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는 때는 집단의 배타성이 드러나는 때다. 부르주아가 성을 쌓아 자신들을 전체에서 구별했듯이,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차별하고 더 나아가 학대를 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한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이 정치의 공간에서 악의적인 편가르기로 왜곡되면 망국적 지역주의가 생겨나고,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간의 동류의식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힘과 결탁하면 패권주의·제국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집단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는 잘못된 집단주의가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안겨줄 수 있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이에 대한 성찰과 개선의 노력은 아직 미미해 보인다.
우리 사회는 구성원 사이의 동질성이 비교적 높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다양한 집단 - 남성/여성, 내국인/외국인, 비장애인/장애인, 오른손잡이/왼손잡이, 정규직/비정규직 등 - 들이 공존하고 있고, 칼로 두부 자르듯 딱 구분할 수 없는 경계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다. 집단주의에 근거한 ‘주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주류에 편입하려고 기진맥진할 것이 아니라, 왜곡된 주류 이데올로기 자체를 깨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이해, 상대방을 평가하는 올바른 잣대는 공존과 평화의 필수 조건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편협한 집단의 눈으로만 상대방을 판단해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이제 집단의 안경을 벗고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천부적 인권을 가진 개인이라는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
김민철/대학생
김민철/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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