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5 18:58
수정 : 2005.03.15 18:58
<한겨레>에 보도된 것처럼 지난 2월 말 국제앰네스티의 창설자인 피터 베넨슨 선생이 타계했다. 나는 그 분을 생전에 두 번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첫 만남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였다. 일흔이 다 된 노인이 냉전 이후의 인권상황을 예견하면서 운동의 미래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 때 인권운동이 단순히 외부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앞날을 주도적으로 개척하는 것임을 배웠다. 국제인권단체를 관찰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그들이 인권을 둘러싼 변수들을 분석하여 통계를 내고 자료의 오랜 축적을 통해 경향을 예측하는 과학적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놀라곤 한다. 우리나라 노동운동가들이 서구의 노동운동 현장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일정이 끝날 무렵 숙소에서 간단한 평가회가 열렸다.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데 누군가가 그 곳 노동단체들이 몇 년 일정표를 미리 짜놓고 활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발언하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시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할 말이 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건에 일일이 대응하기도 벅찬데 언제 한가하게 ‘계획’할 틈이 있었겠는가. 국가의 그림자 내각처럼 활동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모든 사안에 대응하고 모든 선거에 신경 쓰다보니 당연히 호흡이 짧아졌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 시민사회 안에서도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기획해 보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권력구조 중심의 개헌논의를 뛰어넘어 시민사회의 가치가 반영된 헌법의 모습을 그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시간의 지평을 길게 잡으려는 움직임은 긍정적이다. 이런 시도가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전체의 기본적인 원칙이랄까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인권 개념에 주목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 하필 인권인가? 인권은 하나의 부문운동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이미 다원화되어 통일된 거대담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시민사회에 대해 인권이 어떤 ‘공통된 합의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인권은 또한 근대의 발전과정 속에서 상당히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 현실 적용이 비교적 용이하다. 게다가 단기, 중기, 장기적 전략으로 융통성 있게 재구성할 수 있어 사회발전의 기획자에게 이상적인 밑그림이 된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회가 아무리 다원화되어도 시민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마지노선은 있어야 한다. 소박하게 말해 그것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고 약자와의 연대이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그러한 열정을 대변하는 ‘언어’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불의에 억눌린 이들은 자신의 절망과 분노를 조리 있게 표현해 주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며, 자신에게 희망을 열어 준다고 느끼는 언어로 말하고 꿈꾼다. 민주화 투쟁기에 사람들이 평등, 해방, 민족의 언어에 열광했던 것도 당시 이런 언어들이 정의를 표현할 수 있는 어휘와 문법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 언어들은 민주주의의 함성으로 번역되어 시대적 소임을 제각기 감당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말도 바뀌는 법이다. 모든 세대는 자기 시대의 정의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뜻에서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정의의 언어는 확장되고 급진화된 인권 개념일 것이다.
마침 2008년 12월이면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는다. 아마 국제적으로도 갖가지 기념행사가 벌어질 것 같다. 그 때는 유월항쟁 20주년이 지나고 새로운 10년을 모색하는 첫 해이기도 하다. 이 계기를 놓치지 말고 시민사회 전체가 중기적으로 사회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정확히 내년 이맘때면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1천일 앞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그때까지 시민사회의 60대 의제를 정해 1천일 동안 실천해 보면 어떨까? 시민사회가 능동적으로 한국 사회를 이끄는 주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조효제/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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