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5 17:16
수정 : 2019.12.26 15:18
방승주 ㅣ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9년 12월18일 문희상 국회의장 외 13명의 의원들은 기억·화해·미래재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한국 또는 일본 기업과 국민의 기부금 등으로 출연하는 기금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발생한 정신적 피해에 위자료를 지급하며, 이 위자료를 지급받는 경우 강제집행 청구권 또는 재판 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여러 헌법적·법률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당장 철회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첫째, 왜 피해 국가의 국회가 주도해서 이러한 법안을 제출하는가? 아마도 이 법안을 성안할 때 참고했을 법한 외국법은 독일에서 2000년 8월2일 발효된 ‘기억·책임·미래재단법’일 것이다. 독일이 이 법안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독일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미국에서 광범위한 집단소송을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피해 국가들과 피해자 단체, 전범기업 등을 상대로 협의체를 구성해서 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내용의 국내법을 통과시켜, 소송보다는 특별법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처럼 피해국 국회가 이러한 법안을 주도하는 것은 주객전도의 모순일 뿐이다.
둘째, 대법원이 2018년 강제징용 판결에서 강조한 것은 이렇다. 일제 식민지배는 불법적 지배였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의 불법행위로 인해 입은 정신적 손해 등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전범기업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법원이 전범기업에 지급을 명한 위자료는 그들이 식민지배 기간 동안 일본 정부와 결탁해 피해자들을 강제동원해서 자행한 온갖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다. 그런데 이 법안은 “위자료”에 대해, 태평양전쟁 때 국외로 강제동원됐던 기간 중에 발생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정신적 피해에 상응하는 금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피해자들로 하여금 위자료 신청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어떻게 피해국 정부가 주도하여 설립한 재단 기금으로 지급하는 돈이 “위자료”가 될 수 있는가?
넷째, 또한 “위자료”를 이 기금으로부터 혹 지급받았다고 해서,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사라진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위자료를 받게 되는 경우 확정 판결에 따른 강제집행 청구권 또는 재판 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는 국민의 헌법상 재판 청구권이나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위헌적 조항이 아닌가 심도 있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재단 운영을 정부의 출연금·보조금으로 한다는 것은 이 기금의 운영주체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왜 가해국 정부와 전범기업이 아니라, 피해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오히려 나서서 대법원의 판결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위자료”를 지급하려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섯째, 독일의 경우 가해국 정부와 전범기업이 공동으로 출연한 기금을 통해 2004년 3월31일까지 170만명의 수급자격자 가운데 150만명의 피해자들에게 많게는 1만5천마르크, 적게는 5천마르크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의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과거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사죄와 배(보)상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진정한 사죄와 배상이 없이 어떻게 재단에 “화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가당치 않다.
이런 여러 가지 헌법적·법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만일 이 법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켜서 한-일 관계의 경색 국면을 그저 정치적으로 미봉하려 드는 경우, 이는 마치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못지않게 피해자들과 국민의 의사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8년 대법원의 판결 취지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오히려 일본 정부를 설득하여 일본 의회가 주도하여 이런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