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2 18:28
수정 : 2020.01.03 14:08
정찬 ㅣ 소설가
2020년 새해를 맞았다.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2001년 새해를 맞은 지 어느덧 19년이 흘러간 것이다. 2001년 새해, 인류는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그전과는 다른 세상을 간절히 희망했다. 21세기 시작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된 1991년으로 보는 역사학자의 시각도 존재한다. 이 시각이 훨씬 역동적인 것은 시간의 기계적 구분에서 벗어나 역사라는 생명체의 변화를 척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에 의해 찢기는 자본주의의 야만적 모습에 대한 도덕적 분노에서 잉태되었다. 도덕적 분노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유토피아의 열망을 자극했고, 그 열망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현실화되었다. 10월 혁명을 아름다운 언어로 감격스럽게 노래했던 러시아의 시인 마야콥스키가 혁명의 거짓된 현재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1930년 4월이었다.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이룩되었다고 해서 계급이 소멸되지 않는다. 계급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단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식욕과 성욕의 본능을 능가한다. 이성과 도덕이 권력의 욕망에 의해 얼마나 희롱당해왔는지, 역사는 환히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적 인간의 높은 도덕성이 권력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불행하게도 공산 권력 역시 인류의 상처인 절대권력의 비극적 전철을 밟았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물신적 관능이 뿜어내는 놀라운 에너지도 간과했다. 이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창출한 것이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경제구조였다.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역시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들이 억압될 때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는다. 마르크스가 꿈꾼 유토피아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은 자본주의 때문이라기보다 유토피아가 요구하는 도덕성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의 무너짐은 지상에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없다는 쓰라린 증명이자, 유토피아가 요구하는 도덕성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절망적 확인이었던 것이다.
희망의 힘은 과거의 성찰에서 나온다. 21세기 희망의 힘은 20세기를 성찰하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에 대한 서방세계의 환호에는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이분법적 도취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도취감 속에는 성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왜 마르크시즘이 생겨났는지, 자본주의의 야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 대신 물신적 관능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든 것이다.
한반도는 20세기에 대한 성찰이 간절히 요구되는 지역이다. 냉전이라는 20세기의 도그마에서 아직까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자연스러운 숨결의 통로를 막아왔던 분단의 누적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판문점 선언의 재확인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포로 및 전장 실종자 유해 송환에 합의한 2018년 6월의 싱가포르 1차 북-미 회담은 한반도의 강고한 분단 구조 해체의 토대를 마련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새로운 북-미 관계는 새로운 남북 관계와 함께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 전체 질서, 더 나아가 세계의 질서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이 불러일으킨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인간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은 공간을 변화시키고, 공간은 시간을 변화시킨다. 한반도의 시간과 공간은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닫힌 곳을 못 견뎌 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남과 북은 갇힌 고통 속에서 70여년을 살아왔다. 고통은 염원을 낳는다. 한반도는 70여년 동안 고통과 염원을 쌓아온 것이다. 1989년 11월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한 시민이 “이제 반 시간이면 고향에 갈 수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다시는 못 갈 것 같았던 고향을 반 시간이면 갈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꿈이 아니고 뭡니까!”라고 울면서 말했다. 2020년이 한반도가 분단 구조 해체로 나아가는 원년으로 훗날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