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0 22:07
수정 : 2020.01.11 02:32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ㄱ씨는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그 자리에 오를 때까지 거의 실수가 없었을 것 같은 그의 이력도 인상적이었지만, 책 계약을 상의하러 직접 만났을 때는 조용히 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마음이 불안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 대한 외경심은 원고(직접 쓴)를 받아볼 때까지였다. 편집을 시작해 보니 이분이 뜻밖에도 문학적 수사가 과도한 격언조의 말을 첨가하려는 유혹을 참지 못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큰 문제로 보였다. 편집자는 글에 대해 엄청나게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을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편집자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는 게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거칠고 미숙한 표현이나 번역투의 문장도 그게 필자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면 손대지 않는 게 옳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이분은 인간의 냉혹한 생존 전략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뜬금없이 감상적인 문장들을 불쑥불쑥 끼워 넣고 있었다.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다른 어느 것보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처럼 보였다.
필요한 말만 담백하게 적는 게 아주 쉬운 일은 아니다. 발터 베냐민에 따르면 나쁜 작가의 특성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라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글을 쓸 때면 이런 경향을 피하기 어렵다. 펜대를 잡으면 누구나 조금씩은 문학가가 되기 때문이다. 글의 이상형은 문학이고, 문학은 ‘뭔가를 예쁘게 말하는 것’이라는 통념이 있으니 이런 경향이 자연스럽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내용을 명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이런 ‘문학화’가 별로 좋은 문학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많은 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비문학을 문학처럼 쓰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것은 중고등학생도 안다. 문제는 이를 아는 이도 자기 글에서는 문학화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통제력은 훈련의 결과이므로, 비문학적 글을 너저분하지 않게, 가장 깔끔하게 써낼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직업 문학가라는 역설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 국민이 문학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겠나? 모든 사람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책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모두가 문학을 ‘가식적으로 표현하는 활동’ 정도로 여긴다 한들 그 또한 뭐 큰 문제겠나? 이미 추락한 문학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것 말고는 누가 다칠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렇게 태평하게만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신문 앞쪽 면들을 넘기다 보면, 사람들이 구체적인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가 효과적인지는 둘째 치고, 문학을 그런 일에 써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문학이란 오히려 뭔가를 가리고 칠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직시하는 태도를 말함이 아니었을까. 가짜 뉴스뿐 아니라 가짜 문학도 정치 담론에 참여하는데, 이게 버리지 못한 문학열 때문인지 철저하게 냉소적인 문학관 탓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좋지 않은 문학에는 공통점이 있다. 똑바로 말하면 될 때 문학을 하려 한다. 그러니 오히려 사람들이 비문학가들, 자신을 문학가라 부르지 않는 이들에게서 늘 어떤 진정한 문학을 발견하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정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럴듯한 대사를 읊지 않고는 못 배기는 태도보다는 조용히 사실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좀 더 괜찮은 문학에 가까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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