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유랑인들이 사는 조립식 주택 정착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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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 ‘선’ 불법 거주자 폐쇄 캠페인
보수당도 5월 총선 겨냥 강경책 가세
노동당·BBC ‘인권법 개정’ 추진 비난 영국 에식스주 크레이즈 힐의 유랑인 정착촌에 살고 있는 노라 슬레이터리(53)는 일요일마다 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조립식 주택 앞에는 성모 마리아 상을 모신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노라는 이웃 주민들한테서 ‘동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는다. 이달 초 영국 대중지 〈선〉이 집시와 유랑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불법 거주지를 폐쇄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노라는 더욱 박해받는 듯 느끼고 있다고 〈인디펜던트〉가 지난 12일 보도했다. 노라처럼 크레이즈 힐 정착촌에 살고 있는 아일랜드계 유랑인 가족 40가구가 5월까지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최근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영국에선 집시·유랑인들의 불법 정착촌 문제가 전국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급기야 5월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이 불법 정착촌을 막을 강경책을 내세우자 노동당이 비난하는 등 뜨거운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 ◇ 보수당 법안=보수당 대표 마이클 하워드는 “집시·유랑인 집단은 노동당이 1998년 도입한 인권법을 이용해 그들이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불법 정착촌을 만들고 있다”며 “허가받지 않은 유랑인 정착촌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하겠다”고 최근 강조했다. 하워드 대표는 △땅 무허가 개발을 허용하는 인권법 재검토 △벌금을 많이 물리거나 불법 이동식 주택을 철거할 수 있도록 지자체 권한 강화 △지방정부에 집시들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땅을 강제 수용할 수 있는 권한 부여 △유랑인들의 땅 무단점거와 정착촌내의 반사회적 범죄행위에 대처할 경찰 안내지침 정비 등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했다. 주민들 “집값 떨어진다” 기피 ◇집시를 꺼리는 이유=정착촌 폐쇄에 앞장서고 있는 크레이즈 힐의 전 시의원 해리 스콧은 “집시·유랑인들은 세금이나 국민연금, 수도세도 내지 않고 사회복지 기금을 받아 살면서 비싼 차를 타고 아이들은 택시로 학교에 보낸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선〉이 펼친 캠페인을 옹호하며 “결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며, 그들은 지역 도시계획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레이즈 힐 주민들은 불법 정착촌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고 불평한다.
영국 남동쪽 켄트주의 한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불법 집시·유랑인 정착촌 관리에 해마다 50만파운드(9억5천만원)가 들어가며, 지난해에만 110여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2003년 8월 윌트셔주에서 집시 56명이 3에이커(3700평)의 땅을 사서 전기선과 상하수도관을 묻을 구멍을 팠지만, 마을 사람들은 도시계획 허가도 받지 않은 행위라며 철거를 요구했다. “유랑인 정착촌 300개 더 필요” ◇ 사회적 취약계층=정부에 집시 관련 자문을 하는 버밍엄대학교 팻 나이너 교수는 “갈 곳 없는 이동식 주택이 4500개에 이르며 이들을 수용하려면 정착촌 300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이라며 “대다수 집단들이 자주 이동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인디펜던트〉는 지난 12일 보건국의 최근 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유랑인들이 질병으로 고통받을 확률이 일반인보다 5배나 높다”며 “평균 수명만 봐도 유랑인 여성은 일반 여성보다 11.9년, 남성은 9.9년이 짧다”고 보도했다. 아이들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다. 집시·유랑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일반인들 자녀들이 점점 사라진다. 지자체가 이들에게 제공하는 땅의 70%는 마을 끝자락에 있고 50%는 도로 바로 옆이고, 4%만 어린이 놀이터를 갖추고 있다. 또 절반 이상은 화재 예방이나 안전 시설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 〈비비시방송〉은 보수당의 주장에 대해 “인권법은 모든 사람들이 정부나 공공기관에게서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특정 그룹에게 더 많은 권리를 주는 게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부총리 대안에 지자체 떨떠름 ◇ 해법은 없나?=집시나 유랑인들이 합법적으로 정착해 살 수 있는 지역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1984년 지자체가 유랑인 정착촌을 의무적으로 마련토록 하는 법안이 통과됐지만, 대부분 지자체는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유랑인들은 정부가 이들에게 땅을 사서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판하지만, 정부는 최종 결정권은 각 지자체 몫이라고 항변했다. 최근 존 프레스콧 부총리는 유랑인과 주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며 한가지 안을 제시했다. 우선 지자체에는 불법 정착촌을 강력히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되, 지자체가 합법적인 정착촌을 만들어 유랑인들에게 필요한 땅과 시설을 지역 도시계획에 포함시키도록 정부가 권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감을 뒤로하고 부총리의 제안을 적극 받아들일 지자체는 많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유랑하는 사람·생활방식 일컬어 ■ 집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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