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11 18:22
수정 : 2005.01.11 18:22
“영국 대사는 (사고 수습을 위해) 들어오자마자 작업복을 입고 시신을 옮기던데, 우리 대사는 멀리서 팔짱을 끼고 맴돌기만 하더라.”
지진해일이 휩쓴 타이 푸껫 현지 우리 교민의 말이다. 모두 작업복 차림이었다는 영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과 그렇지 않았던 우리 쪽 대사·직원들의 외양의 차이는, 일의 결과에서도 드러났다. 이번 사건에서 푸껫 근처의 10명을 포함해 한국인이 모두 12명이 숨졌지만, 사고 직후 한국인 피해를 접수·처리할 현장대책본부는 대사관이 아닌 우리 교민들이 준비했다.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고 병원과 선착장에서 부상자와 실종자를 찾는 작업도 현지 교민들의 몫이었다. 굼뜬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비판과 분노는 사고 직후부터 끊이지 않았다.
<추적60분> 팀은 한국인의 지진해일 피해를 취재하기 위해, 타이와 스리랑카에 4명의 피디를 보낸 터였다. 타이 취재는 푸껫의 피해 현장을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특히 한국에서부터 실종자 지현진씨의 오빠 용철씨를 동행한 박용석 피디는 사고 현장인 피피섬까지 들어갔다. 한국인 희생이 가장 많았던 피피섬을 우선 취재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대사관 쪽은 피피섬은 통제되어서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이미 각 국의 구조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외국 취재진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선착장을 통과하고 섬 전체를 촬영하면서, 통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대사관은 선착장이나 병원에서 배로 후송돼 나오는 시신의 신원 확인만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벌써 일부 시신들은 동·서양인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패해 있었고, 피피섬에는 이미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피피섬에서 동생의 흔적을 찾지 못한 오빠 지씨는 취재팀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동생 찾기를 포기하려 했지만, 취재팀의 권유로 끄라비의 시신안치소를 마지막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푸껫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끄라비에서 지씨 등은 극적으로 현진씨의 유류품을 발견했다. 지씨는 제 손과 눈으로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확인했다. 동생이 다니던 회사에서 받았던 수영복, 어깨 위 반쯤 지워진 ‘H’ 모양 문신, 그리고 자신이 사준 은목걸이…. 지씨의 오열은 그칠 줄 몰랐다. 현진씨는 말레이시아에서 유학 중인 친구들과 함께 육로로 타이에 들어왔고, 피피섬으로 건너갔다. 현진씨의 이름이 여행사 자료에 남지 않은 까닭이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살아남지 못했다면 실종자 명단에 오르지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가족이 오지 않았다면 누가 그의 유류품을 확인해줬을까? 취재 결과, 현진씨처럼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피피섬에 간 한국인은 23명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자가 직접 선착장과 병원을 다니며 확인한 숫자다. 이 가운데엔 부상자도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이런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소재미확인자로만 분류돼 있다.
한국 정부의 수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찰청 과학수사과도 현지에서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의 지문을 채취하고 있었다. 시신 상태가 나빠서 그 작업 또한 매우 힘들 테지만, 하루만이라도 일찍 나섰더라면 지문 확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현진씨 시신에서도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제2, 제3의 현진씨가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고 직후 1분, 1초라도 빨리 과학수사대나 119 구조대 등 현장 작업인력을 보내지 못한 것이 대사관의 가장 큰 실수다. 우리는 취재 끝무렵 정부에 물었다. “왜 피피섬에 가지 않고, 왜 자유여행객들의 피해는 조사하지 않는지”에 대해 정부에 따졌다. 그러나 “시신을 확인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기막힌 대답만 돌아왔다. 그러나 육지의 병원에서 파일만 확인해서는, 또 동양인으로 보이는 시신의 겉포장만 열어봐서는 절대로 한국인들의 피해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장 취재를 한 우리 팀의 공통된 생각이다.
현진씨의 실종은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가 알렸다. 20대 초반의 그는 친구를 잃은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그 자신도 수영복 한벌만 입은 채 이국 땅에서 곤경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그도 한국 정부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푸껫에서 위기에 처한 그는 한국 정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 스스로 머물 곳을 찾고, 지씨와 함께 친구를 찾고, 또 한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왜일까? 대사관 직원들은 그저 시신만 확인하고 있기 때문일까? 팔짱만 끼고 주변을 배회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강희중/ <한국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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