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12 18:30
수정 : 2005.01.12 18:30
며칠 전 모 신문사에서 주최한 ‘남성과 가족’이라는 주제의 신년 좌담회에 갔다. 그 자리에서 만난 어떤 남성이 내게, “여자들이 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를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남자도 피해자다, ‘싸우기 전에’ 남자들을 달래야 한다”는 요지의 ‘충고’를 했다. 물론, 그는 ‘목소리 큰 여자들’이 ‘걱정’되어,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다. 여성운동이 “남자랑 싸우자”는 주장인가? 장애, 노동, 민족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가에게도 “네 목소리를 낮추고 지배 세력을 위로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진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왜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는 합창되는데, 가사, 임금, 육아의 3중 노동에 시달리는 ‘일하는’ 엄마들을 위한 노래는 없는가…. 꼬리를 무는 의문으로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그에게 이 말의 시비, ‘효율성’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분석이 필요한 언설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는 유난히 남자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남성을 불쌍히 여기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 “남자는 독립적이고 강하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은, 실은 서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얘기다. 남성인 시인 허연은, 서부 영화에서는 악당이 쳐들어오면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네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마 한국에서라면 아버지와 아들은 “엄마가 나가 봐”라며 치마 뒤로 숨을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의 통계들은, 노동시장 ‘진출’ 확대와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한국 여성의 권한 척도는 현저히 낮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가부장적 신념이 강한 사회인데도, 왜 남성을 “약하고 불쌍하다”고 재현할까? 왜 그토록 남성들은 ‘열등한’ 여성들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할까?
대학과 시민단체, 정부 기관과 노동조합 등지에서 여성학 강사와 상담가로 일하는 나는,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남성에서부터 성폭력, 가정폭력 가해자까지 다양한 남성들을 만난다. 그런데 ‘마초’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이들은 모두 내가 칭찬과 격려로 일단 자신들을 달래주기를 원한다. 이른바 ‘지혜로운 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는,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다는 것을 매번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라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을 상기하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우리를 달래주세요!”라는 남성 담론은, 모든 면에서 여성보다 이성적,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성폭력에서만큼은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며 스스로 자신을 동물의 수준에 놓는 것처럼, 남성을 여성과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 ‘성장이 멈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혹 이러한 ‘응석’이 남성의 성장과 우리 사회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사회는 피해자가 직접 말하는 것, 사회적 약자가 권위적인 언설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여성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학벌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나는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며 흥분한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력과 관용의 사회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이리가레이의 말대로,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하나의 목소리마저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유일한 것으로 군림해왔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질 때, 비로소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가부장제지, 여성의 ‘직설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다양한 목소리들의 화음, 이것이 새해, ‘목소리 큰 여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정희진 서강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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