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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2 19:11 수정 : 2005.01.12 19:11

노무현 정권이 선 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개혁 후퇴와 실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드세게 제기해 왔다. ‘노무현 없는 대통령’, ‘얼치기 개혁정권’이나 최근에 쓴 ‘개혁의 타락’이란 글이 그것들이다. 노 정권에 대한 나의 반복적인 문제 제기는, 한편으로 개혁에 거는 기대를 접을 수 없었던 나의 안간힘의 표현이기도 했다.

권력은 그 자체로 민중적이지 않다. 그리고 정치나 행정에 입문하는 대학교수들이 종종 증명해 주듯, 권력 앞에서 최종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그동안 표명했던 정치의식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권력지향의 정서인데, 권력의 일상 또한 사람의 정서에 일상적으로 작용하면서 의식을 변화시킨다. 그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곧 개혁의 진정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성찰이 요구되며, 동시에 권력의 품에서 일상이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정치 세력이 아직 취약한 한국사회에서 당적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노무현 정권도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다. 권력은 여전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며, 사회 구성원들의 시민의식 부재와 수구언론의 영향력 아래, 개혁의 실종이나 후퇴에 맞서 권력 내부에서 중심부를 비판하거나 마침내 권력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을 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이처럼 자기성찰과 비판이 효과적이지 못하며 당적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 권력은, 그 일상에 의해 비민중적으로, 나아가 반민중적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권력중추의 거처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던 ‘개혁’ 세력의 과거 한때 의식을 지배했을 법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라는 말은 그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들은 앞으로도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만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극복이라는, 그들이 한때 품었던 과제와 정면에서 충돌한다는 것조차 모르거나 무시할 만큼 그들의 의식은 자신의 가까운 과거조차 배반할 만큼 바뀌는 것이다.

최근 ‘이기준 3일 교육부총리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노무현 정권이 집권 초기에 그나마 보여주었던 긴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한테서 꾸중을 듣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들에게서 긴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바꾸어야 할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민중성의 상실을 반영하며, 실용주의라는 이름의 현실 영합주의와 보수세력 끌어안기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미종속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후퇴하고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개혁’의 중심 목표가 된다. 4대 개혁법안이 요란함 속에서 해를 넘긴 반면에, 파병연장 동의안과 함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 민간투자법, 기금관리법 등 신자유주의 관철을 위한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제 ‘개혁’은 인간의 얼굴을 상실한 이데올로기로만 남았다. 실제로, 나는 노무현 정권한테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어려웠다. 늙은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민주화된 시대에 …”를 말하는 비인간성은 이데올로기로만 남을 ‘개혁’의 단초를 말해준 게 아닐까. 김선일씨의 처절한 외침 앞에서도, 지율 스님 앞에서도, 공무원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파면할 때도, 그리고 추위 속에 단식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친 일천여 농성단에게도 노무현 정권은 인간의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이 사라지고 이데올로기로 남은 ‘개혁’의 오만은 ‘이기준 사태’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도 다시금 확인되었다.

광복과 분단 60년, 그러나 개혁은 놓칠 수 없는 절절한 역사적 요구다. 오늘도 나는 절망적으로 비판하고 말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것은 끝내 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고질병 때문이다.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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