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장성익 <환경과 생명> 주간,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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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과 천성산, 부안 등은 최근까지 우리 사회를 흔든 열쇳말들이다. 시민들에게 이제 ‘환경’이란 주제는 일상 생활속에 녹아든 중요하고도 친숙한 이슈가 됐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외면당하고 있다. 무관심을 넘어 냉소와 비판의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환경운동의 ‘권력화’와 ‘귀족 환경운동’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10여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의 환경운동은 위기를 맞은 것인가? 환경운동연합 김혜정(41)사무총장과 계간지 <환경과 생명>의 장성익(39) 편집주간이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현재 환경운동이 처한 위기를 진단하고 새로운 진로 찾기에 나섰다. 장 주간은 최근 자신의 잡지에 쓴 글을 통해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김 사무총장은 지난 2월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의 직접 투표를 통해 당선돼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장성익 소수 ‘환경귀족’ 권력화 현장 활동가 소외·허탈감 김혜정 쓴소리 냉정하게 수렴 전문성 더 키워 생활밀착 ‘환경귀족’ 등의 용어를 써서 문제 제기에 나섰던 장 주간은 “고생하는 활동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를 바란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사무총장은 “장 주간의 비판을 취임 선물로 달게 받겠다”며 분위기를 바꿨다. 장=환경운동이 위기냐 아니냐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의 환경운동이 처한 현주소에 대해 더 정확한 진단과 평가가 내려져야 합니다. 저는 ‘환경운동 위기’의 핵심이 제도화·권력화에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다만 제도화·권력화한 부분이 시민들에게 크게 어필되는 측면은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 환경운동 진영이 자기 반성과 성찰, 변화와 쇄신을 이뤄내는 생산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성찰과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은 결국 기대와 애정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죠. 그동안 환경운동 진영이 쏟아지는 현안에 매달려 자기성찰이라든지, 장기적 연구가 부족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사실 우리 내부에서도 운동의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많이 해왔거든요. 그러던 차에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으니 한편으론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느낌도 드네요.(웃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뜻 아니겠냐는 생각입니다. 또 이런 비판이 시민사회가 성숙해 가는 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장=환경운동의 위기에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 짚어봐야 할 점도 있습니다. 요즘 정부정책은 물론이고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가 ‘경제 살리기’란 이름 아래 개발과 성장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반환경적인 정책과 법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고 있고요. 그런데 환경운동이 여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환경비상시국회의니 초록행동단 등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여론의 호응이나 대중적 관심이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예컨대 천성산 문제만 해도, 정부의 국토개발 사업과 교통정책 전반에 대해서 환경운동 진영이 적극 문제제기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호기였잖습니까? 천성산 싸움의 진행과정에서 환경단체 한쪽이 정부에 섣불리 타협하는 자세를 보여 혼선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환경운동 위기론의 직접적 원인이예요. 근본적 원인이란, 시대가 급속히 변하고 시민대중의 의식도 많이 변했는데 환경운동이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김=환경운동을 비판할 때 고생한 활동가들의 충정어린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염려스런 부분이 있어요. 환경비상시국회의 때에 많은 활동가들이 추운 겨울 바깥에서 잠자가며 고생했어요. 그들의 진의는 제대로 평가해줘야 해요. 그렇지만 고생했으니 그걸로 모든 평가가 완료됐다는 건 아니죠. 환경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설득해서 시민들과 함께 노무현 정권의 환경실정을 비판하는 태도가 부족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이 환경비상시국을 선언한다는 것만으론 시민사회의 지지와 협조가 형성되지 못했으니까요. 우리 운동에서 시민 참여가 미흡했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환경단체들이 관성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개발사업의 대응이란 것이, 일상적으로 집요하게 할 일이지 일시적 연대나 비상적 결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또 천성산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국책사업이나 교통정책에 대해 근본적 문제제기와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겸허하고 냉정하게 수렴해야죠. 장=환경운동도 시대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90년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시대변화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부각이예요. 신자유주의가 정부 정책에서부터 사회·경제 시스템, 나아가 개인들의 의식·가치관·생활방식까지 파고들어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 돈과 경제의 가치가 온세상을 지배하는 쪽으로 가고 있잖아요. 그 과정에서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환경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이 90년대 들어 눈부신 성장을 했지만, 이렇게 갈수록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사회 흐름과 운동을 둘러싼 조건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분위기가 커지고 개인주의·물질주의가 급속히 퍼졌죠. ‘나와 내 가족이 어떻게 살아남는냐’가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고, 대신 환경문제 같은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선 관심과 애정이 많이 식었어요. 또 개발 문제만 해도 이전의 국가 주도 개발에 더해 이제는 시장과 자본 지배 사회가 되면서 개발주의가 더욱 교활하고 세련된 형태로 기승을 부리는 것도 환경 운동에 불리한 요인입니다. 환경운동 진영이 이런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했던 겁니다. 과거 ‘잘나가던’ 때의 명성과 영광에 안주해 자만심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중과 함께 호흡한다든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런 부분에 둔감해진 거죠. 장/ 정책수립 적극참여 제목소리 필요 비난여론 불끄기용 들러리 경게를
김/ 많은 운동가 한겨울 노숙하며 고생 내부에서도 질적변화 꾸준히 고민 김=맞습니다, 많이 변했죠. 외환위기 이후에 경제논리·개발논리가 더 강해졌습니다. 우리 사회에선 언제나 개발과 성장 논리가 우선시되었지만 외환위기를 겪고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재벌이 유포하는 개발 논리가 더욱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풍요와 안락에 대한 집착, 물질주의도 더욱 만연해서, 돈이면 최고다는 식의 인식이 팽배합니다. 개발과 성장에 대한 다른 시각, 합리적인 문제제기도 뒷전에 밀리기 일쑤입니다. 과거에는 개발독재, 환경파괴 기업과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우리 ‘내부의 적’, 내일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고 지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무기력과 냉소주의와 같은 더욱 힘든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웰빙’이란 것도 대표적인 예죠. ‘잘살기’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기본 가치이고 쾌적한 환경을 전제로 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중산층과 부유층이 추구하는 ‘럭셔리 문화’로 둔갑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 다시 시민 속에서 그 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환경운동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 시민운동이라는게 다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것 아닙니까? 언제 우리가 미리 정해진 방법을 갖고 운동했습니까? 문제를 인식하면 그 속에서 방향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환경운동의 체질 개선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은 운동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속에서 개인의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운동의 전문성과 실력을 키우는 문제입니다. 반환경적인 집단과 싸울 때는 전문성과 실력으로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장=환경운동의 제도화·권력화에 대해 저는 비판적 입장이지만, 이는 곧 환경운동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환경운동이 정부의 정책이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개입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속에서 운동의 원칙이 훼손된다는지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래서 늘 경각심을 가져야 돼요. 현 정부에 대해 ‘토건국가’니 ‘개발국가’니 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신중치 못하게 정부가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부·자본의 들러리를 서는 것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부정책 수립이나 법 제정 초기 단계에서는 환경운동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하지만, 정부가 다 벌여놓고 분쟁이 불거지니까 환경단체를 슬쩍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김=시민운동이 정부정책에 참여하고 결정과정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제도화라고 말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높이는 것이 시민사회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문제는 상층단위의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힘을 통해 어떻게 정책적 변화를 이루어내는가 하는 것이예요. 감시와 비판은 어떤 정권 아래서도 변할 수 없는 시민운동의 원칙입니다. 정부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되 참여하는 내용과 원칙에 대해 충분한 토론과 준비를 통해 제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부정책 과정에 참여하는 활동이 단체 안에서, 그리고 회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고 전달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보다 원칙적이고 책임감 있는 정책 참여가 가능해지고 ‘환경귀족’이라는 오해도 피할 수 있습니다. 환경문제라는 게 정부와 함께 사업을 하는 ‘거버넌스’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과정이 중요합니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갖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본질입니다. 거버넌스를 통한 해결은 우리의 본령이 아닙니다. 환경문제의 사회적 공론화를 말할 때, 이는 운동의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허상에 지나지 않아요. 운동가의 눈이 시민 ·파괴된 현장, 피해받는 주민에 맞춰지고 회원과 함께 호흡할 때 건강한 운동의 힘이 나옵니다. 지역에 내려가 보면, 열악한 상황에서 모범적이고 건강한 풀뿌리 운동을 하는 곳이 많습니다. 장=‘현장’과 ‘대중’이라는 두 화두를 붙잡아야 해요. 환경운동 희망의 근거지는 풀뿌리입니다. 제가 ‘환경귀족’이란 표현을 쓰면서 환경운동을 비판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환경운동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조명과 사회적 명성이 소수의 개인이나 단체에 집중된 게 사실이거든요.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현상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서 생기는 부작용인데, 운동의 성과와 영광이 특정 소수에게 귀속되고 소수 특정 단체가 우리 사회의 환경운동을 과잉대표한다는 얘깁니다. 어떤 단체가 한국의 환경운동을 대표한다든지, 그 단체가 빠지면 전체 연대가 잘 안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환경운동 전체 차원에서 보면 ‘메이저 중심주의’‘권위적 패권주의’입니다. 그래서 일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활동가들이 소외감, 무력감, 허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이런 소수의 핵심 간부들의 의사결정을 독점해서 운동 진영이 관료화·경직화하기도 하고요. 저는 이런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고 있어요. 이들 환경귀족은 환경운동의 장기적 발전과 연대,협력의 분위기를 해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경제적으로 궁핍을 겪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못 찾고 있어요. 2003년도 자료를 보니 전국의 시민단체 활동가 중 25%가 그해에 일을 그만두고, 활동가들의 평균 재직기간도 2년이 안되는 것으로 나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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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경운동이 소수에 의해 과잉 대표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많이 바뀌어져가고 있다고도 봅니다. 환경운동을 시작할땐 소수가 먼저 앞장섰기 때문에 생긴 역사적 현상인데, 이미 환경단체도 많아지고 환경운동가들도 수가 크게 늘었어요. 운동분야도 전문화, 세분화되고 있고요. 환경운동 발전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장=이 문제는 결국 환경운동이 ‘새로운 리더십’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시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언론 조명 따라다니기 바쁘고, 무슨 행사때마다 얼굴 내밀고 축사하고 악수하느라 바쁜 것도 좋지만, 이런 사람들을 통해 환경운동의 커진 힘과 영향력이 기업의 재정적 후원을 당겨온다든가 정부한테서 예산 받아오는데 활용되고 있어요. 환경에 대한 진정성은 없으면서, 환경운동이 아주 그럴 듯하고 고상한 테마이다 보니, 일부 사회 명망가들이 모여서 환경을 명분으로 무슨 ‘사교클럽’을 운영하는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대중들에게 이런 행태가 다 보인다는 겁니다. 성직자들이 삼보일배하고 단식하는 모습이 이런 환경귀족의 건강하지 못한 행태와 곧바로 대조가 되는 거죠. 환경운동 펼치기가 안그래도 어려운데, 대중들에게 환경운동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철회하게 만드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장성익 언론에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일상에 ‘스며드는 물’ 같은 운동 절실
국민이 낸 세금 공적가치 투입 차원 시민운동 정부지원 지금보다 늘려야 김혜정 현장 진흙탕서 싸우는 환경운동가들에게 성직자 실천방법 요구하는 건 모순
10대∼20대 중심 ‘발랄한’ 운동 모색 ‘전선식 연대’ 탈피 비판·경쟁 나설것 김=시민운동은 도덕성에 기반하고 시민의 신뢰에 따라 힘과 영향력을 얻는 것입니다. ‘환경귀족’이란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활동가들에게는 수치이고 모욕이예요. ‘환경귀족’에 대해 비판한 부분에 대해 저도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하지만 언론에서 성직자들의 삼보일배·단식과 환경운동을 귀족주의로 몰아붙이며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악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환경귀족’이라고 평가받을 정도의 활동이 있었는지 냉혹하게 우리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환경운동 전체의 문제로 몰아붙이는 것은 시민운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장=‘환경 귀족’은 그야말로 이른바 상층 지도부의 극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얘깁니다. 성직자가 할 일과 운동가가 맡은 역할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한쪽에선 활동가들이 지역주민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다른 쪽에선 빛나고 좋은 자리만 찾아다니는 모습이 분명히 있거든요. 보수 언론이 이를 악용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악용하고 있기도 해요. 그렇다고 이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문제제기를 한 것이고요. 소수의 ‘환경귀족’ 때문에 환경운동 전체가 안좋게 비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와, 기왕 이런 얘기가 나온 바에 이를 ‘환경운동의 새로운 리더십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의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김=시민운동은 보편적인 운동입니다. 시민과 회원 속에서 호흡하는 게 운동입니다. 운동가는 우리 사회를 바꿔간다는 이상과 전문가의 이론을 갖고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대중들의 뭇매를 맞으며 진흙탕에서 뒹구는 그런 사람들이예요. 성직자의 행동과 운동가의 활동을 등치시켜, ‘운동이 개량화됐다’고 하는 것은 시민운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운동가는 주변의 비판을 달게 받고, 언제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균형있는 평가를 해줘야 비판이 발전적으로 작용할 수 있단 얘기죠. 장=제도화 비판에 있어서 시민운동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보수 언론은 이에 대해 공격을 합니다. ‘제도화했다’는 거죠. 이런 시각엔 문제가 있어요. 시민운동에 대한 정부 지원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늘어야 합니다. 물론 회원 확대 등 시민 단체의 자체 재정 확보 노력이 전제되어야겠지만, 국민이 낸 세금을 공적 가치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운동에 투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타당합니다. 유럽의회에서는 회원국 정부에게 예산의 0.1%를 엔지오에 지출하도록 권고까지 하고 있거든요. 우리의 경우엔 보수 언론이 이를 공격해 대고 있고, 시민들의 정서도 아직 시민단체가 정부돈을 받아 일하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정부 예산 지원 방식을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지금은 정부가 프로젝트 중심으로 시민단체로부터 사업 공모를 받아 배분하고 있는데, 이러다 보니 지원이 사업단위로 끊어지고,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 위주로 돈이 쓰이는 문제가 있어요. 또 이 때문에 시민단체가 언론에 잘 드러나는 쪽의 사업에만 신경을 쓰게 되고요. 정부가 지원 금액을 더 늘리고, 그 돈으로 일종의 기금이나 재단같은 것을 설립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운영하면 됩니다. 환경운동 진영이 이를 먼저 제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장 주간은 김 총장에게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같은 환경운동’을 주문했고, 운동의 최일선에 선 김 사무총장은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통해 시민·회원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체질개선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김=운동단체가 회원의 회비로 재정자립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습니다. 전체 예산에서 회비의 비중을 높이고 정부 프로젝트나 기업 협찬의 비중을 낮추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러나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사업에 참여하고 기업의 협찬을 받으면 운동단체가 변질되는 것처럼 이를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정부의 지원과 관련하여 선진국처럼 세제 혜택 범위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면서 공익사업에 대한 지원을 늘여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보다 투명하게 제도화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업의 경우 교보생명문화재단처럼 공익재단을 설립하여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환경운동하는 이들을 격려하는 것은 매우 좋다고 봅니다. 장=환경운동의 질적 성장을 위해 운동 진영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해야될 일이 많지만, 우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고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능력을 길러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 변화를 따라잡으면서 대중에게 호소력있는 쟁점과 이슈를 개발하고, 그들과 결합해 나가는 방식이 필요해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 학생의 종교수업 거부 운동, 성적소수자 운동, 외국인노동자 운동, 여성운동의 성인지적 예산확보 운동 등 다른 부문에서는 참신한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민운동의 활로를 뚫어나가게 하고 있는 겁니다. 이에 비해 환경운동은 대중을 다시 끌어들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의제와 담론을 형성하는 데에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또하나는, 환경운동의 민주주의 문제입니다. 자기 성찰과 혁신을 이루려면 민주적인 조직운영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체들도 회원과 시민대중에게 상시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외부로부터 평가와 검증받는 시스템도 적극 고려해야 하고요. 이렇게 열려있는 구조로 가야 대중과 호흡을 맞출 수 있어요. 김=그런 부분은 저도 계속 고민하고 강조했던 부분이에요. 성장 중심의 운동, 관성적인 운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를 계속 해왔습니다. 운동의 과정을 중시하고, 시민이 함께 참여해야 느리더라도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가 가능합니다. 과거의 운동이 교훈적이고 심각한 주제를 갖고 했다면, 지금은 시민들이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발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운동 진영이 가르치고, 제시하고, 하고싶은 것만 하겠다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운동의 아이템들은 회원과 소통 과정에서 생산되는데, 그래서 중요한 것이 쌍방향 소통이죠. 이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는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에 공간을 열어두고 많은 사람들이 내놓는 얘기 속에서 운동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환경운동에서 가장 취약한 세대가 10~20대인데, 정작 앞으로 운동을 이끌 사람들은 그들이예요. 그래서 저는 네티즌 세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회원과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그들이 문제를 들여다 보고 판단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또 회원과의 쌍방향 소통을 통해 생활 속의 환경운동을 이끌어내고 많은 소모임을 만들어내 함께 호흡하고 풀어가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운동의 전문성 강화와 실력 배양을 통해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환경운동의 질적 변화라고 생각해요. 물론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죠.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에 매몰되어 무기력과 냉소에 젖어있으니까요. 장=시민운동, 환경운동을 비판할 때 운동이 ‘백화점식’이라거나 ‘종합선물세트’라고 말합니다. 환경운동이 좀더 특화된 개성과 색깔을 드러내고 전문화·차별화된 영역을 찾아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어떤 단체는 백두대간이나 갯벌 문제와 같이 자연생태 분야에 집중하고, 또 어떤 단체는 토지, 도시, 환경불평등 같은 사회경제적 이슈에 집중하는 식이죠. 정부 정책 비판과 대안 제시를 핵심 운동영역으로 하는 전문적 단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풀뿌리 강화죠.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또 지역단위에서 자생적 시민운동을 환경운동과 연결시키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저는 언론에 ‘보여주는’ 환경운동이 아니라 ‘스며드는’ 운동으로 가야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물과 같은’ 환경운동이죠. 낮은 곳으로 흐르고, 빈곳을 채우고, 결국 모여서 바다로 가는, 그런 내용과 형식을 가져야 합니다. 김=각 환경운동 단체들이 색깔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진작부터 그렇게 되어야 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단체마다 색깔과 생각이 다 다른데, 지금은 ‘전선식 연대’의 형태로 묶여있는 겁니다. 발전적이지 못한 방식이예요. 각 단체가 다양한 논쟁도 벌이고, 그 속에서 비판과 경쟁, 연대를 벌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연대’란 방식에 익숙했지만, 지금은 다양성이 존중받는 때입니다. 정리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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