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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3 20:10 수정 : 2005.01.13 20:10

우리는 무슨 까닭으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미국’으로, 잉글랜드를 ‘영국’으로 그리고 프랑스를 ‘불란서’로 표기하고 있을까? 혹자는 무슨 생뚱맞은 말인가 할 터이다.

이런 명칭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서양 나라의 이름을 자기네 발음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조합한 말이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는 美(米)利堅共和國으로 일컬었고, 이를 줄여서 美國 또는 米國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우 亞米利加合衆國 또는 アメリカ나 米國이라고 표기한다. 이럴 경우 중국말이나 일본말로는 ‘아메리카’ 공화국(합중국)이라고 발음된다. 물론 우리의 발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USA를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는 ‘米國’으로 표기하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美國’으로 표기한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인데 왜 우리나라만 ‘아름다울 미’자로 표기할까? 그냥 USA나 ‘아메리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우리가 ‘아름다운 나라’로 일컬으며 숭앙하듯 ‘미국’이라고 쓰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잉글랜드(England)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는 英吉利國이라고 쓰며 이를 줄여서 英國이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 英國 또는 이기리스(イギリス)라고 하며,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獨逸(ドイツ)로 표기한다. The United Kingdom을 영국이라고 하면 ‘영웅의 나라’라는 뜻에 근접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이 자기네 식으로 발음하기 위해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스페인을 ‘서반아(西班牙)’, 인디아를 ‘인도(印度)’, 인도네시아를 ‘인니(印泥)’, 필리핀을 ‘비율빈(比律賓)’이라 일컫고 있다. 말레이시아를 ‘말련’이라 하는데 이것 또한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말레이시아의 ‘말’과 연방의 ‘연’이 합쳐져서 ‘말련’이라고 줄여 부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소개된 서양 국가들의 중국식·일본식 명칭이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오래전부터 그처럼 사용해 왔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라의 이름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이름에 따라서 그 나라가 우리의 의식에 새겨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제멋대로 불러서는 안 된다.

이것도 모자라서 일부 사람들은 서울을 일컫는 말도 한자식으로 쓰고 있다. 사실 중국인은 서울을 ‘한성(漢城 ; 한청으로 발음)’이라고 하고, 일본인은 ‘경성(京城)’이라고 하며 ‘서울’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거리감을 갖는다. 그러나 중국은 워싱톤(華盛頓 ; 훠-셩툰), 파리(巴黎 ; 빠리), 로마(羅馬 ; 루-마) 등 서양 지명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발음에 충실한 한자를 만들어 내는 성의를 보이면서도 유독 서울은 漢城(한성)으로 표기함으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은근히 짓밟고 있다.

뜻으로서의 한자가 우리 말글 생활에서 약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음 기호로서 한자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한자 병용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뜻으로서 한자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자는 뜻글자로서의 의미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미국, 영국, 독일과 같은 나라 이름이 그 예다. 설사 한자가 뜻글자라 해도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자가 반드시 하나의 뜻만 가지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뜻이 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은 중국어나 일본어와 달리 어떠한 발음도 적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표기가 제대로 안 되는 중국식, 일본식으로 나라 이름 따위의 명사를 그렇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한사코 이런 표기를 고집할 경우, 우리 말글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며 우리 문화는 썩어 갈 따름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 머뭇거리거나 더듬거리는 일이 없으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버리는 바에야.

손의식/용인송담대학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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