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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6 18:27 수정 : 2005.01.16 18:27

몇 개월 전 ‘국제 테러리즘’과 연결됐다는 국내 외국인의 ‘반한 단체’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가 곧 오보로 밝혀졌다. 당국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의 종교·인권 단체들까지 ‘테러적 반한 단체’로 규정되어 그 활동가들이 억울한 고충을 당하게 되는 셈인데, 무엇보다 그 ‘반한 단체’라는 말은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반한 테러 단체’라는 말과 겹쳐지는 이미지 하나가 나타나 필자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주인공은 통상 서방 언론의 말에 따라 상상되는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이슬람 광신도’의 지하 서클이 아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라는 엄중한 느낌의 현판이 걸려 있는 목동의 한 큰 건물에서 정장을 한 채 심사대에 조용하게 앉아 있는 중년 관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 국가기관이 반국가 테러단체라니 이건 말장난치고도 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참고 생각해보자. ‘테러’란 원래 무슨 뜻인가? ‘공포’란 뜻이다. 미국의 세계적 공포정치에 맞선 이슬람 과격파의 행동들도 ‘테러’로 볼 수 있겠지만, 절대적 약자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횡포도 공포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국가적 폭력 즉 ‘테러’적인 행동으로 밖에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수년 동안 피땀을 흘려 일해온 노동자들이 ‘불법 외국인’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친구나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말도 못한 채 길 가다가 잡혀가고, 합법 체류의 노동자들마저도 “불법 동료들의 주소를 대라”는 단속반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심지어 안산외국인노동자 센터의 목사인 일개 성직자마저 구타와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끼며 살고있다. 이슬람 테러가 살인을 다반사로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 단속반은 누굴 죽인 것도 아니지 않았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사채로 천만원대의 빚을 지고 정당한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내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사형선고에 가깝다는 사실을, 사채업자의 횡포가 극심한 한국에서라면 이해돼야할 만도 하다. 단속반의 ‘업무수행’에 대한 공포로 몇 개월 동안 안식처를 떠나지 못하고 끼니도 못 챙기는 국가적 테러리즘 피해자들의 사정을 생각보야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관련의 방침이 위에서 하달되는 것이고 단속반이 집행할 뿐이라는 변명의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그러면 ‘동북아 허브’를 꿈꾸는 국가에서 “유쾌한 체류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방침을 내렸을 법한 많은 합법 체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 이 국가를 손아귀에 넣어 보려는 구미인·일본인 투자자들이야 당연히 편의를 제공받아 목동에 가서 떨 일이 없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한국인 남편을 둔 필리핀 부인이나 베트남 유학생, 중국인 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말투와 고압적 태도로 누명이 짙은 그 곳으로 갈 때마다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차별과 멸시의 벽이 허물어져 ‘유쾌한 체류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한국과 아시아·아프리카를 연결시켜주는 친한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상적 공포에 적대감만 느끼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반한 활동’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근엄한 정장 풍의 이 ‘반한 분자’들이 끼치는 해악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 숙련·비숙련을 포함한 외국노동에 대한 근로허가제와 차후 영주권 부여의 가능성을 근간으로 하는 포괄적인 근로이민 수용의 제도가 근본대책이 되겠지만, 우선 빠른 시일 내에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행정적 장치들이 마련돼야 한다. 미국 사업가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가 옆에 있는 베트남 노동자에게는 갑자기 봉건시대 노예 대하듯 하는 관료가 자신의 행동에 무거운 법적 책임이 따를 줄을 알게 되어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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