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5 17:46
수정 : 2005.06.05 17:46
“내가 얼마나 대학을 가고 싶어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해야 했다. 남동생들도 있고, 요즘 들어 엄마도 자주 아픈데…. 내가 철없이 굴 순 없다. 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20살, 나는 늘 우울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두살 위인 교회 누나를 친누나처럼 따랐던 적이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보이던 시절, 누나에게 뜬구름 잡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유치하게도 내 일기장을 건넨 적이 있다. 10일쯤 지났을까? 누나는 내 일기장에 자신의 일기를 적어 다시 내게 보내왔다.
당시 누나는 여상을 졸업하고 투신사에 막 다니고 있었다. 일기장을 돌려받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내색을 않았던 터라, 늘 환하게 웃던 누나가 그런 아픔을 지니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어쩌다 그때가 생각나면, 잊혀지지 않는 이 구절이 지금도 내 가슴을 아린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누나는 몇 년 뒤, 남동생들이 대학을 들어간 이후,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때 대학을 다니던 나는, 누나가 애써 번 돈을 들여가며, 공부시간을 확보하려 투신사에서 월급이 적은 조그마한 개인회사로 직장까지 옮기는 것이 여러모로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흔한 이야기다.
고교시절의 또다른 이야기. 82년 어느날, 갑자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동네별로 일제히 소집된 적이 있다. 내가 살던 대구뿐 아니라, 전국이 다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전두환 정권이 대학생 반정부 시위를 미리부터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던가 추정된다. 소집장소인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동별로, 학년별로 또 나뉘었다. 내가 속한 그룹은 남학생 3명, 여학생 1명이었다. 처음 보는 담당 선생님이 대표를 뽑으라고 했다. 나를 제외한 2명의 남학생은 공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그 학교의 중대장(당시는 교련시간에 학생들을 군대 편제로 나눠 학급 반장은 소대장, 세 학급 대표는 중대장, 학년 대표는 대대장, 학생 대표는 연대장으로 불리던 때였다)이었다. 분단장도 아니었던 나는, 당연히 “이 친구가 적격일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했고,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계속 미적대며 나를 ‘동네 대표’로 뽑으려 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어색한 분위기였다. 말은 안 했지만, 거기에 있던 모두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며칠 전 “우리 국민의 60%가 이미 대학을 나온 국민이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해 시끄럽다. 전 대변인은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진의가 ‘왜곡’됐다며, “학력 지상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것에 콤플렉스를 지니고, 배운 사람들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전 대변인의 발언 기사를 읽으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누나’가 갑자기 생각났다. 아마도 이미 오래 전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섰을’ 누나가 이런 일로 마음 아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나의 젊은 날 아픔이 ‘대학 나온 60%’들로부터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대학을 나오지 못한 40%의 ‘나머지 사람들’이 60%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비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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