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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26 20:29 수정 : 2013.05.15 08:25

김효순 대기자

그 판결이 추석 연휴 전에 나온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연휴 기간에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국정원이 박원순 변호사에 대해 명예훼손 소장을 낸 지 1년 만에 사법부의 첫 판단이 나왔다. 국가가 원칙적으로 개인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판결의 관련기사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문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평소 두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도 아니다. ‘지은 죄’가 있어 소송의 추이와 판결의 파장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한 1년3개월 전에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국정원은 박 변호사가 아무런 근거 없이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고 주장하고 박 변호사와 그의 발언을 보도한 매체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나는 당사자에게는 폐가 될지 모르지만, 국정원이 검토만 하지 말고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래서 본격적인 의혹공방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국정원의 소송 결정에 내 의견이 얼마나 참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기자회견에서 대응방침을 밝히는 박 변호사의 표정을 보고서는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절로 들었다. 가뜩이나 바쁜 양반이 원치 않은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면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주제넘게 싸움을 붙이고 나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박 변호사의 사찰 의혹 제기 발언이 화제가 됐을 무렵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몇 차례 얘기를 나눴는데 개중에는 다소 썰렁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요지는 정권이 바뀐 뒤 비판적인 시민단체에 대한 목조르기는 훨씬 전에 시작됐는데, 박 변호사가 그때는 조용히 있다가 탄압의 마수가 자신에게 미치자 입을 열기 시작해 서운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정부 지원금을 받는 시민단체들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 뭔가 흠을 잡아내면 일부 보수신문에 흘려 마치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의 온상인 것처럼 몰아갔다. 나아가 후원금 입금 경로를 틀어막으려고 해 재정곤란을 겪지 않는 단체들이 없었다.

시민단체 내부의 세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역으로 생각했다. 신망이 있고 모나지 않아서 지지자들이 많은 박 변호사 같은 인사가 나선다면 정보기관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는 싸움에 승산이 있다고 봤다. 한겨레신문사가 김영삼 정권 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던 대통령 차남에 얽힌 의혹을 보도해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의 광고탄압을 받았을 때 참으로 외로운 싸움을 했다. 대기업의 간부들은 사석에서는 정보기관의 압력을 넌지시 알려주지만, 공개적인 발언은 철저히 꺼렸다. 처지를 바꿔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만, 신문사의 존립이 걸린 문제여서 야속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박 변호사 정도의 사회적 위상을 갖춘 사람이 주체가 된다면 시민사회의 힘이 결집돼 싸움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모든 것이 과하면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제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은 일부 ‘불온한’ 인사들의 무책임한 주장이 아니다. 집권당의 유력한 의원들조차 사찰을 당했다며 의혹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이 의원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찰을 시인하는 것도 아니니 오락가락하는 행동의 기준이 참 궁금하다. 켕기는 구석이 많아서인지 박 변호사에 대한 소송에서 정부쪽 소송대리인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였다. 막판에는 선고기일이 지정됐는데도 ‘정치일정’을 이유로 무리하게 변론재개 요청을 하며 판결 시일을 10월말 이후로 늦춰 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정치적 이해를 초월해야 할 정보기관이 매사 정치적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이다.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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