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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20:06 수정 : 2005.06.30 20:06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구에서 피난 시절을 보내던 중학생 김우중은 서문시장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맨 먼저 배달소에 도착하는 그는 다른 소년들이 오기 전에 냅다 시장바닥을 달렸다. 그러나 얼마 돌리기도 전에, 배달소년들이 몰려와 독점 시간이 적었다. 고안 끝에 그는 돈을 안 받고 신문을 마구 뿌렸다. 신문을 다 돌린 뒤, 돌아오면서 신문값을 받았다. 물론 일부는 떼였지만, 수익은 더 많았다. 얼마 안 가 서문시장 신문팔이 소년은 김우중만 남았다.

그는 늘 ‘상식’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우중이 돌아왔다. 고희의 노인이 되어. 평생 ‘일’에만 매달린 사내, 개인적으로 연민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교통사고로 큰아들을 잃었을 때를 제외하면 그는 30년 동안 휴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사고에 젖은 인물이었다. 배판에 배판을 거듭하는 카지노식 경영이었으나, 잭팟은 두 번 터지지 않았다. 외환위기로 이자율에 숨이 막힐 때도 쌍용차 인수, 400억달러 무역흑자론, 삼성차 빅딜, 제너럴모터스(GM) 협상 등 ‘한 큐’에 모든 걸 해결하려 애썼다. 그는 대우 워크아웃 이후, “지엠과의 협상 실패가 대우 몰락의 원인”이라고 말했고, 일각에선 대우 해체가 정권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는 게 ‘상식’적 판단이다.

1998년 경제부에 처음 배치됐을 때, 첫 출입처가 대우그룹이었다. “재무구조가 불안하다”는 주장에 대우가 자랑스레 반박한 것이 “34개 계열사 가운데 지난해(97년) 적자 난 곳이 한 곳도 없다. 수치를 보고 말해야지, 감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였다.

그때 대우자동차의 순이익은 신기하게도 매년 1억~2억원 사이였다. 자동차 경기와 무관하게 흑자가 그렇게 일정한 금액을 유지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리벙벙하던 경제부 초년병 시절, ‘감’은 있지만 ‘수치’를 못 구해 끙끙대기만 했다.

99년 대우의 국외 투자 규모는 80억달러, 그런데 차입금이 68억4천만달러였다. 세계경영의 83%가 빚이었다. 정권과의 결탁, 분식회계, 금융기법 등이 토대였다.

세계경영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김 회장이 루마니아에 당시 내수시장의 5배에 이르는 생산능력을 지닌 공장을 세우려 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갔다. 아무리 성장성을 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투자였다. 돈을 더 많이 빌리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옛 대우 계열사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약 29조7천억원, 회수된 금액은 7조7천억원, 모두 20조원 가량이 회수될 것이라는 게 정부 바람이다. 그래도 10조원은 국민들이 떠안아야 한다.

김 전 회장은 현재 무일푼이다. 경주 힐튼호텔, 하노이 대우호텔, 아트선재센터, 경주 선재미술관, 아도니스 골프장 등은 가족들 소유다. 적법한 증여 절차를 거친 가족 재산으로 환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책임지기 위해 귀국한다”고 했다. 거기에 가족들에게 증여한 재산 일부만이라도 국민들에게 ‘증여’하는 성의도 포함됐으면 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상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상식 뛰어넘기’ 장면으로는 ‘경영 복귀’보다는 훨씬 나은 소재다.

권태호 경제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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