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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1 16:55 수정 : 2005.01.21 16:55

지율스님의 긴 단식과 그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소식에 기분이 묘하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함이 가슴 속에서 요동친다고나 할까? 그 이유는 아마 고속철도의 천성산 관통을 저지하기 위한 그 긴 단식이 경이롭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방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속철도 건설을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지율스님의 단식이 고속철도로 인한 우리사회의 들뜬 분위기에 무언가 제동을 걸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의 단식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천성산 도롱뇽을 살리자는 운동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천성산 살리기 운동을 사람들은 생명운동이라고 부른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 가치이고 생명의 대안은 없기 때문에 그 운동에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생명이나 죽음이란 말 앞에서 사람들은 숙연해진다. 도롱뇽 살리기 운동을 성원했던 사람들은 아마 지율스님이 자기 생명을 걸고 타협없는 운동을 벌여왔기에 그러한 숙연함을 느끼고 그 운동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식이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엷어져갔다. 최근에 스님의 육신이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는 보도가 나오자 다시 관심이 살아나는 듯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지율스님의 생명운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이유는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근본적으로 우리사회가 개발과 경제 제일이란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논리가 생명논리를 잡아먹은 탓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천성산 관통노선 폐지라는 후보시절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경제논리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일상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논리가 추상적이고 낯설게 여겨지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상 세계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협이란 필수적이다. 이런 보통사람들에게는 천성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숨을 건 단식이 짐스럽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천성산 관통만 막기 위해서 단식을 한다고 비쳐졌을지 모른다.

“환경영향평가 제대로 해보자”는 요구가 천성산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쳐졌다면 논의를 크게 넓힐 필요가 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작년 여름 여러 환경단체가 지율스님의 단식에 성원을 보내고 직접 돕기도 했다. 이 때 우리나라의 가장 큰 환경운동단체도 돕고 싶어했지만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래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포기한 것으로 안다. 나는 논의를 넓히는 것이 뾰족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고속철도의 천성산 관통에서 시작해서 고속철도 건설이나 도로건설을 넘어 우리나라의 교통정책 자체로까지 논의를 넓히는 일을 그 환경단체에서 주도했다면 지금쯤 상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속철도 건설계획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나는 거기에 들어가는 돈으로 일반 철도망을 크게 확충해서 전국 각지를 철도로 연결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불필요하게 도로를 많이 건설할 필요도 없으니 환경도 적게 훼손하면서 지역간의 교통도 그럭저럭 해결하게 된다. 교통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꽤 줄어든다. 천성산 살리기 운동이 사회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바로 그러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우리나라의 교통정책 전반에 관한 건설적이고 폭넓은 논의를 기대했다. 그걸 환경단체에서 주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이런 답답한 상황까지 왔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지율스님을 어떻게든 살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교통정책에 대해서 어느 정도라도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면 지율스님도 저렇게까지 단식을 밀고나갔을까?

이필렬/방송대 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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