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23 21:59
수정 : 2005.01.23 21:59
지도를 펴보라. 그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이다. 그곳은 평균 고도 1,550m의 고원지대이며, 아직도 남쪽 지도에는 함경북도로 되어있지만 북의 행정구역으로는 양강도에 속한다. 이 겨울, 그곳은 보통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엄청나게 추운 곳이다. 그곳은 백암군. 지도를 보다가 옷깃을 여밀 정도로 매서운 눈보라를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 감성적인 사람이다.
‘백암’이라는 지명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 이름은 ‘버섯구름’ 운운하며 의문의 폭발이라는 보도로 문득 다가왔다. 마치 핵실험을 한 양 한반도의 정수리라 할 백두고원이 의심받았지만 종내는 확인되지 않는 추측보도로 결론지어졌고 북쪽 사정에 밝은 이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발전소 건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알고 있다. 대규모로 지어지는 백암 수력발전소의 현장은 가문비나무와 잎갈나무 사이를 지나온 바람이 마구 살갗을 파고드는 곳이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건설장비의 접근도 쉽지 않은 곳이며 오로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말겠다는 북녘 청년들의 의기만이 메아리로 떠도는 곳이다. 그 두 사람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인 김경호와 범청학련 북측 위원장 김인호다.
그들이 비닐 텐트 안에서 잠을 자고 비닐을 뒤집어쓴 채 현장을 누빈다는 얘길 들은 건 지난해 말이었다. 금강산에서 이뤄진 북측 저작권 관련 실무회의에서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가 나는 한동안 마음이 짠해졌다. 금강산의 바람도 찬데 그곳은 얼마나 추울까.
김경호 비서와는 금강산 구룡폭포 구간을 함께 오르며 이야길 나눈 일이 있었다. 청년동맹이라는 조직을 가장 강력한 주체사상조직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조직은 차라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조합조직에 가까웠다. 인민학교 아이들의 상장을 만들고, 대학을 졸업하는 맹원의 일자리를 마련하는 조직이 청년동맹이었으며 조직 내의 가장 핵심인자들은 ‘청년건설돌격대’였다. 그들은 맨 손으로 평양과 남포 간의 청년영웅도로를 건설했고,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경호 비서 또한 무수한 건설 사업에 앞장서 청년영웅의 칭호를 받은 소위 노가다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와는 그 뒤로도 두 번의 만남으로 호형호제의 사이가 되었지만, 남쪽 언론을 통해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혹은 서열 20위권의 노동당 핵심간부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에는 동일인물인지를 의심하곤 했다. 차라리 발전소 건설의 현장을 기꺼이 자원했다는 인편을 통한 소식이 믿을만했다. 비즈니스나 임금 때문이 아니라 ‘인민’들의 생활을 위해 백두고원을 향하는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실로 우리와는 다른 삶의 방식이다. 그렇지만 평양 청년호텔 접대원 동무의 저녁식사를 걱정하던 그의 선굵은 목소리는 그런 방식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김경호 비서나 김인호 위원장의 얼굴이 더 검어졌을 걸 걱정하는 것은 단지 이 겨울의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나에게 없는 것을 본다. 아니 어쩌면 그들 또한 나를 통해 그들에게 없는 걸 보았는지 모른다.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도시의 매연과 밤거리의 네온사인 사이에서 술병처럼 쓰러질 때, 산과 산 사이를 넘나들며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맞장을 붙겠다는 사내들이 있다는 건 그 얼마나 호쾌한 일인가 말이다. 반대로 그들이 자신의 체제에 갇혀 있을 때, 자유로운 정신으로 이데올로기들의 사이와 다양한 인류의 삶을 넘나드는 우리가 있다는 건 또 그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말이다.
우리 고유의 말 중에 ‘눈부처’란 말이 있다.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일컫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상호공존의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부처’라는 거룩한 단어가 붙었다. 마치 진정한 시원함을 뜨거움 속에서 발견하듯이 나의 진정한 실체는 상대방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사회의 진정한 실체 또한 북녘사회의 모습 속에 있는지 모른다. 좀 더 상호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백두의 찬바람 속에서도 그들은 따뜻하지 않을까.
신동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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