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전쟁 절멸 보장 법안’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난 세기 초에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이 각국에 이런 법률이 있다면 전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 10시간 안에 다음 순번에 따라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 파견된다. 첫째로 국가원수, 둘째로 그의 친족. 셋째는 총리, 국무위원, 각 부처 차관. 넷째는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계 지도자들. 전쟁은 국가 권력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며 일으키는 것이라고 홀름은 생각했다. 따라서 권력자들부터 희생되는 시스템을 만들면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야스쿠니 문제> 등의 저작을 통해 ‘국가와 희생’의 문제를 파헤쳐온 다카하시 데쓰야의 최근작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연하게도(!?) 홀름의 제안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가난한 이의 자식, 헐벗고 굶주린 소년병이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현실은 더 나빠지고 있다.
다카하시는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석달 뒤 쓴 글에서 홀름의 제안을 원전 사고에 적용해보자고 했다. 원자로의 방사능 누출을 막을 ‘결사대’에 총리(한국의 대통령), 각료(장관), 주무 부처 차관과 간부, 전력회사 사장과 간부, 원전 추진 과학자·기술자, 원전을 인구 과소지에 떠넘기고 전력을 써온 도시 사람들 순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원전 확대·수출’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나 도쿄전력 사장이 결사대로 나섰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피폭당해 죽을 때까지” 원자로를 봉쇄하고 오염수를 처리해야 하는 이의 대부분은 후쿠시마 출신 하청노동자이거나 떠돌이 노동자다.
이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햇볕 풍부한 고장’ 밀양(密陽)을 떠올리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으로도 유명한 그곳 말이다. 정부와 새누리당과 한전 등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가 전력난을 겪지 않으려면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실어나를 초고압 송전탑을 밀양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바라는 거 없으니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밀양의 노인들을, 공익을 외면하는 이기주의자라 폄훼한다. 새누리당의 최경환 원내대표는 노인들을 돕겠다고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 밀양에 온 시민들을 ‘외부세력’ ‘종북세력’이라 비난한다. 다수 언론은 이런 주장을 아무런 비판 없이 앵무새처럼 되뇐다. ‘글로벌 코리아의 국격’을 입에 달고 사는 대한민국 정부와 집권당과 이른바 ‘메이저 신문·방송’은, 민주사회에서 적극 권장해야 할 ‘시민연대’를 ‘외부세력의 개입’이라 비트는 가당찮은 천박함에 아무런 부끄럼이 없다. 아무 데나 ‘종북’ 딱지를 붙이는 지적 태만함에도 그들은 부끄럼이 없다.
“원전을 세우려면 도쿄 중심부에 세워야 한다”던 히로세 다카시의 절규를 이 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원전과 초고압 송전탑을 짓고 싶거든 서울에, 당신 집 앞마당에 세우라.’ 전력난과 대안 부재 따위를 내세워 원전·초고압 송전탑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이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잊지 말자. 평화(이슬람)와 사랑(기독교)과 자비(불교)와 어짊(유교) 따위를 권장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서로 다투면서도 공유하는 단 하나의 윤리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 ‘내가 겪기 싫은 건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황금률(기독교)·역지사지(맹자)·서(恕·공자) 따위로 달리 불리지만 다 같은 뜻이다.
이제훈 국제부장 nomad@hani.co.kr밀양 2967일, 폭탄이 된 주민들 [한겨레캐스트#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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