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2 18:24
수정 : 2014.02.0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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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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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시절이던 1999년 3월1일,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부인 힐러리, 딸 첼시와 함께 휴가를 즐기던 때 일이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잠시 잊고 시내의 한 서점에 들렀던 클린턴은 체면을 왕창 구기는 면박을 당했다. 책을 고른 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내밀었더니 “클린턴씨!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 카드는 어제로 사용 기한이 끝났는데요”라는 서점 직원의 답변이 돌아왔다.
직원의 말에 클린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에다 새 카드를 두고 온 것 같소. 난 ‘빌 클린턴’이오”라며 현직 대통령임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러자 직원은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W. J. 클린턴’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며 거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클린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수행 비서한테서 돈을 꾸어 책값을 치르고 서둘러 서점을 떠났다.
미국 사회의 신용카드 중독증을 해부한 책 <신용카드 제국>(로버트 D. 매닝)에 소개된 클린턴의 일화는 텍사스주 일간지 <휴스턴 크로니클>에 게재된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니 실화일 게다. 미합중국 대통령도 유효 카드 없이는 집밖을 나서기 어려운, 신용카드 제국의 ‘신민’(臣民)일 뿐이라는 신용카드의 일상성은 오늘의 우리에겐 더 심해져 있다.
아침 출근길 집을 나설 때 휴대전화와 함께 신용카드는 빠뜨려선 안 될 필수 소지품이다. 지하철을 30분가량 타고, 걷기엔 늦겠다 싶어 버스로 갈아탈 때 현금 대신 카드를 내밀기 시작한 건 언제인지 가늠도 못할 정도로 가물가물하다. 1만원 아래 택시요금이나 음식값을 지불할 때 카드를 내더라도 민망하지 않게 된 것도 오래전이다.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한 뒤 현금을 꺼내는 일은 상상 밖의 일이 돼버렸다. 아내와 같이 본 영화 관람료, 설 연휴에 시골 어머니 집을 오간 열차 운임, 식사 뒤 마신 커피 값도 카드 없이는 지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상의 경제활동 무엇을 떠올려 봐도 카드와 얽히지 않는 게 없어 보인다.
신용카드 3사의 고객 정보 유출 사건에서 비롯된 충격의 강도가 컸던 것은 이런 일상성과 깊은 연관성을 띠었을 성싶다. 1억400만건이라는, 이전의 정보 유출 사고와는 질적으로 다른 피해의 광범위는 어느 누구도 피해의 예외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신용카드와 이별하고는 살 수 없게 된 처지에선 공포와 찜찜함을 느끼는 것 외에 별달리 마땅한 대응을 할 수 없다. 말썽을 일으킨 문제의 카드사 홈페이지에서 정보 유출 사실을 확인하고도 현행 그대로, 또는 부지런을 떨어 재발급을 받더라도 신용카드는 또다시 생활의 필수품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카드 정보의 대량 유출을 계기로 신용카드 제국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건 금융 분야에서 최소 수준의 공공성마저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입맛 쓴 현실이다. 제국의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대출모집인들은, 수익만을 맹렬하게 좇는 금융회사의 식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 영업 수단(금융정보)의 불법 여부를 가릴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 난감한 현실의 구조 개선 없이는 금융 정보를 몰래 빼내서라도 돈벌이에 나서려는 유혹은 언제든 상존할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정보 유출 사건은 거듭거듭 터질 수밖에 없고, 카드 제국의 신민을 공화국의 시민으로 회복시키는 과제의 수행도 요원할 터다. 금융기관 또한 주식회사로서 수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단기 수익 추구가 자칫 장기 이익 상실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닫는 각성의 기회로 삼는다면 멀고 먼 구조 개선보다는 좀 더 빠른 해결의 길로 나아갈 수있겠지만….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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