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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18 18:32 수정 : 2016.03.18 18:56

나는 이번 학기, 영문과에서 학부생들에게 근대 영미소설을, 서사창작과에서 소설과 희곡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생들에게 문화비평이론을 가르치는 중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만날 때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긴 불안을 마주칠 때면 그토록 두렵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

취업준비생에게는 최고의 학점, 최고의 영어점수, 교내와 교외에서의 다양한 활동, 외국생활 경험, 인적성시험이 필수이고, 나아가 여학생들의 경우엔 외모까지도 평가 대상이 된다. 애인이 있어서 결혼할 예정인 여성은 채용하지 않는다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제 발로 나가야 하는 회사도 있다는 경악스러운 말까지 들었다. 작가가 되려는 학생들은 소설, 연극, 비평 등 전통적인 예술창작활동 전반이 새로운 미디어와 환경에 밀려 축소되고 사라질 가능성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이 엔터테인먼트에 밀려 급격히 고사되고, 인문학이 실용학문과 스펙경쟁에서 밀려 취업 과정에서 찬밥 신세가 되는 현상은 확실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이세돌을 격파한 ‘알파고’가 인문학 분야로도 확장될 거라는 전망도, 기존의 휴머니즘을 비판하며 넘어서려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이론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현상도 이러한 경향성을 보증해준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점함으로써 상류층 소득집중도가 아시아 최고이고, 소득수준에 따른 기대수명이 10년 넘게 차이 나며, 특목고·자사고·강남권 일반고의 서울대 합격률이 50%(군 단위 출신 2.5%)에다, 청년실업률이 12.5%로 1999년 이후 역대 최고라는 이 ‘헬조선’에서 청년으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생존의 무리 속에 들기 위해 자신의 삶까지도 걸어야 하는 엄청난 인생 도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키드>(어린이)에서 <프로듀스 101>(소녀)을 거쳐 <슈퍼스타 K>(국민)에 이르는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와 그 변형체들은 한국인들이 겪어내야 하는 사회적 운명의 알레고리다. 특목고와 자사고 입학하기, 서울 상위권 대학 입학하기, 대기업 정규직 취업하기, 육아휴직 이후에도 버티기, 퇴직에서 밀려나지 않기 등은 이미 청년들의 삶에 프로그래밍된 한국인의 운명이다.

이런 서바이벌 체제에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게 청년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서 살아남은 대가는 세계에서 58번째로 행복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 살아남아 승리한 청년들은 설현처럼 자기 몸과 재능이 상품처럼 거래되고 광고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살아남지 못해 실패한 청년들은 노동착취와 성폭력과 미래가 없는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유럽 사람들처럼 여유롭고 멋지게 사는 꿈을 실현하는 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여유롭게 외국생활을 하면서 취향과 교양까지 획득한 후 서울의 ‘핫플레이스’에서 유럽식 카페와 식당을 운영하는 부자 3세들뿐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테이크아웃드로잉 같은 기존 가게를 내쫓는 폭력은 필수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한국 사회를 ‘딥러닝’으로 배운 청년들은 이 서바이벌 체제에 적응해서 성공하는 게 유일한 답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적응하고 성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사실은 자신의 패배뿐 아니라 이 야만적 체제를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제 바깥을 상상하고,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행동하는 일이 없다면 미래는 모두에게 진정한 ‘헬’이 될 것이다. 나는 인문학이 그런 저항의 베이스캠프가 되길 원하지만, 인문학마저도 비즈니스로 전락한 오늘날엔 그마저도 요원해 보인다. 딱 그만큼 지옥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 같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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