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
노대통령 “나와 뜻달라도 대화·타협 할것” |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이후 일본 정부와 언론 등의 분위기는 ‘당혹’과 ‘신중’으로 요약된다. 일본 정부 등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두 나라 정부 사이에서 논의되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노 대통령 발언의 진의와 한국 정부의 후속 조처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파장이 확대되는 것을 꺼리는 모습이다.
언급 자제하는 정부=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한국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국내용’으로 평가하면서 되도록 직접적 거론을 피하려 애썼다. 이런 태도는 “국내 사정을 생각한 발언일 것”이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논평에서 잘 배어난다. 외무성 관계자들도 최근 독도 문제로 한국내 대일감정이 급속히 악화된 것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강경한 자세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정치권과 언론에 대해서도 냉정한 대응을 당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이런 대응은 일차적으로 노 대통령 발언이 가져다준 당혹감이 반영돼 있다. 과거사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정례 정상회담까지 열면서 우호관계를 다지던 노 대통령이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 강력한 어조로 일본의 과거 책임을 질타한 것을 일본 정부로선 당장 ‘소화해내기’ 어렵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에선 대응을 자제하면서 노 대통령 발언이 실행에 옮겨질 것인지를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 발언의 파장이 확대되는 데 대한 경계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선 과거사, 특히 이미 정리된 것으로 여겨온 개인배상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한국 정부의 한-일 협정 외교문서 공개 이후 한국에서 재협상론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에 정면으로 대응하면 자칫 재협상론에 기름을 붓고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될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다. 도쿄의 한 외교 소식통은 “노 대통령 발언이 국내용이라고 강조하는 데는 일회성으로 넘어가기를 바란다는 일본 정부의 기대가 담겨 있다”고 풀이했다.
보조 맞추는 언론=일본 언론들도 대체로 정부와 인식을 함께하면서 한국 내부 사정에 대한 이해와 차분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기류를 가장 잘 반영해온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는 1일 간판뉴스인 저녁 7시 뉴스에서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의 발언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데 그쳤다.
과거사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해온 <아사히신문>은 “대일 융화책을 기본으로 해온 노 대통령도 국민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일본에 대한 비판은 한국 국내용이라며 가볍게 보기 쉬운 일본에 대해 3·1 독립운동 기념일이라는 특별한 날을 택해 뜻을 전달하고 싶다는 노 대통령의 비통한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외무성 당국자의 말을 따 “일본 정부 안에서는 한국민의 반일감정 고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며 일본 정부로서는 교류사업 등을 통해 “한국내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려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류열풍 등으로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역사인식과 영토 문제가 현안으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일본 쪽도 과거사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한국 여론을 자극하는 말들을 삼갔으면 한다는 요청이 담긴 것이라고 전했다.
김정일 변호사?=그렇지만 일부에선 노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 때문에 국민들의 대일감정에 편승하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집권 자민당의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참의원 간사장은 “노 대통령의 정권 기반은 불안정하다”며 국내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또 납치문제와 관련한 노 대통령의 발언에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데 대해 <산케이신문>은 1면 해설기사를 통해 “북과 동조”했다고 비난했으며, 민영방송 출연자들은 노 대통령을 ‘김정일 변호사’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망=노 대통령의 발언을 국내용으로 치부하려는 일본 쪽의 분위기에 비춰 당장 일본 정부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과거사나 북한 문제를 대국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새롭게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한국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를 담은 것이라는 한국 쪽의 인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쪽도 차분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현안들에서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일 것이라는 관측은 나오고 있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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