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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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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1922~2019)
서울 개신교 집안서 맏딸로 태어나
YWCA서 남녀차별 철폐 앞장
김대중과 결혼하며 고난의 길
사회적 약자 향한 따뜻한 시선
마지막 10년, 평화 운동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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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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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별세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은 여성·민주·평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00년 가까운 고인의 삶은 여성 권리 신장,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구현을 향한 투쟁으로 일관했다. 고인은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의 권익 실현을 위한 싸움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 50년 가까이 민주화 운동의 동반자로 살았으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바친 평화운동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낸 불굴의 신념가였다.
고인은 1922년 9월 서울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부모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여서 고인은 모태에서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 자랐다. 기독교는 고인의 삶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고인을 든든하게 지켜준 정신적 지주가 됐다. 고인은 세브란스의학교를 나와 의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일곱살 무렵 충남 서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배움의 뜻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지원 아래 고인은 어려서부터 향학열을 불태웠다.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고인은 1936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했다. 그 시절 고인은 반장을 도맡아 하며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기 일처럼 알아서 함으로써 급우들의 신망을 받았다. 맡은 일을 다 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고인의 성격은 이 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한 고인은 일제 강점 말기의 혼란 속에서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충남 예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 서울로 올라온 고인은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고인은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와 함께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남녀평등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여학생들의 리더로서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섰고,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 시절 고인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독립적이고 활달한 행동 때문에 ‘다스’(das, 독일어 중성관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사회참여운동의 일환으로 연극 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당시 고인은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백범 김구를 존경했다고 훗날 밝혔다.
1950년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피란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어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여성의 권익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가부장제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전쟁 중의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고인은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고인은 초대 회장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권리 주체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오래 꿈꾸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고인은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58년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서른여섯에 귀국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사회학 강사 생활을 시작한 고인은 1958년 겨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발탁됐다. 이 단체의 총무로 있던 4년 동안 고인은 전국의 와이더블유시에이 조직을 돌면서 여성 권리 쟁취를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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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결혼식 때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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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여성운동가 이희호의 삶을 바꾼 것은 1962년 야당 정치인 김대중과의 결혼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 고인과 인연을 맺은 김대중은 당시 전처를 비운에 잃고 박정희 군사정변 세력에 탄압당하던 무일푼의 정치 낭인이었다. 집에는 어린 두 아들(홍일·홍업)과 심장병을 앓는 여동생과 어머니가 있었다. 고인은 주위의 집요한 반대를 무릅쓰고 김대중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고인은 훗날 회고했다. 결혼 뒤에도 고인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날로 심해지는 박정희 정권의 집요한 방해와 탄압 때문에 1970년대 들어 여성운동가로서 활동을 그만두었다. 고인의 투철한 남녀평등관은 정치인 김대중의 여성관을 바꾸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김대중은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결혼 직후 대문 옆에 ‘이희호’·‘김대중’ 문패를 나란히 단 것도 아내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음을 훗날 김대중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혼과 동시에 고인에게는 길고 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닥쳤다.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탄압의 칼날은 유력 야당 정치인 김대중에게 집중됐고, 고인과 고인의 가족, 주변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고인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혹독한 시련을 이겨냈고, 그 시련의 시간을 견디며 정치인의 아내를 넘어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 투사로, 민주화운동의 ‘동역자’로 거듭났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뒤 국외 망명을 택한 김대중에게 몰래 쓴 편지에서 고인은 “한국을 대표해 더 강한 투쟁을 하라”고 독려했다. 고인은 남편에게 민주화 투쟁을 중단하고 안전한 길을 찾으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 있던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당하자 고인은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남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에 돌아오기까지 6일의 시간은 죽음의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일생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고인은 훗날 회고했다. 그 지옥의 시간을 거치며 민주주의에 대한 고인의 신념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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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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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세웅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직후 고인은 남편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민주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돼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정보부 취조실에서 한 이 말은 고인의 가슴속에 간직된 민주주의 신념을 올곧게 보여주는 말로 기억된다. 이 사건으로 고인의 남편이 재야인사들과 함께 투옥돼 2년10개월 동안 격리 생활을 하던 시절은 또 다른 투쟁과 단련의 기간이었다. 이 시기 내내 고인은 재야인사의 부인들과 함께 지칠 줄 모르고 석방운동을 벌였다. 석방운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대학생들의 가족들과 함께 ‘양심수가족협의회’도 만들었다. 당시 고인은 구속자 가족들의 대변인 자격으로 외국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수가족협의회는 1980년대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됐고, 민가협은 독재정권에 맞서다 자식·형제가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화운동 가족들의 구심점이 됐다. 고인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같은 이들과 함께했다.
유신체제의 종말 이후에도 고인과 고인의 가족이 지나야 할 환란의 터널은 끝이 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한편에서는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인의 남편과 가족,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때 큰아들 홍일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가 영구장애를 얻었고 끝내 파킨슨병의 악화로 고인보다 앞서 생을 마쳤다. 남편과 자식을 신군부의 마수에 빼앗긴 고인은 가택연금이 풀리기까지 1년 동안 몸이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은 감시와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속에 자고 나면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옥의 시련 속에서 고인의 민주주의 신념은 오히려 커졌다.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인은 남편에게 군부세력과 타협하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1981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고인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면회한 남편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어느 누구도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는 일이 없게 하시고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의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뒤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나는 그때만큼 아내를 존경하는 눈으로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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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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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남편과 함께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1997년 대통령 선거 승리라는 감격을 안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함께 이룬 승리였다. 대통령 부인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고인은 어려웠던 시절의 마음과 태도로 사회적 약자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특히 젊은 시절 여성인권운동가의 이력을 살려 여성의 권익 실현을 위해 때로는 앞에 나서서 때로는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 장차관 수가 크게 늘고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여성가족부가 만들어진 것도 고인의 노력이 배어든 결과였다. 1998년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고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 데도 여성운동가 이희호의 삶이 녹아 있었다. 2000년 남편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스다이차오>가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 해온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라고 쓴 것은 고인의 삶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할 것이다. 2002년 5월 고인은 유엔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임시의장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유엔총회에서 여성이 임시의장을 맡은 것은 고인이 처음이었다.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했을 때 고인은 서울시청 앞 노제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 남편이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말은 고인의 지난 삶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했다. 2009년 9월 고인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동역자이자 동지로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남편이 해오던 일을 이어가는 데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였다. 고인은 이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방북해 조문했고, 2015년 8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각계 인사들과 함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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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하는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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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관통해 21세기에 이른 100년 가까운 삶을 회고하면서 고인은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신념을 올곧게 지켜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고인은 자신이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에 이어 고인의 마지막 10년은 평화운동가의 삶이었다. 긴 고난 속에 핀 신념의 꽃과 같았던 97년의 생애였다. 이제 남편 곁으로 돌아간 고인이 하늘에서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힘써주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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