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4 18:20
수정 : 2005.02.14 18:20
1980년대 난지도생활 나도은씨
“10년 넘게 쓰레기로 먹고살았지만, 좀처럼 여길 떠날 수가 없더라고. 난지도는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
‘넝마주이’ 나도은(55·마포구 상암동)씨는 난지도를 ‘고향’이라고 했다. 충남 서산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을 이끌고 ‘돈벌이’가 된다던 서울 난지도로 흘러든 것은 1980년 3월이었다. 매섭던 꽃샘추위에 하얗게 일어나던 쓰레기 먼지가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고 그는 말했다.
“처음 들어와 보니 거지 소굴이나 다름없더라고.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켜켜이 먼지가 앉은 양재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 건네는데, 그걸 마시다 다 토해버렸어.”
그가 난지도에 입성했을 때는 너덜너덜 해진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얼굴에 때가 끼어서 알아보기도 힘든 넝마주이들이 이미 200여명이나 들어와 살고 있었다. 온종일 쓰레기더미 사이를 헤매며 병이며 고철, 알루미늄 깡통을 주워 생계를 잇던 사람들 틈에서 나씨도 생활 기반을 잡아야 했다.
“남들은 넝마주이라고 비웃겠지만, 난지도에선 쓰레기 줍는 영역이 엄청난 ‘이권’이야. 쓸 만한 물건이 많이 섞여 있는 명동 같은 지역의 쓰레기를 받으려면 그때 돈으로도 200만~300만원의 웃돈은 족히 줘야 했으니까.” 이렇듯 쓰레기를 거둬온 곳에 따라 난지도 안에서도 구역이 달랐다. 넝마주이들은 미리 계약된 자기 지역에 가서 쓰레기를 받은 뒤, 다음번 쓰레기 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재빨리 쓸 만한 물건을 건져내는 일을 마쳐야 했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번 돈을 운반업자와 7 대 3 정도로 나누는 거야. 이렇게 돈 내고 쓰레기 줍는 사람들을 ‘앞벌이’라고 했고, 앞벌이가 다 주운 뒤의 쓰레기에서 돈 안 내고 줍는 사람들을 ‘뒷벌이’라고 불렀지.”
나씨는 말 그대로 개미처럼 일했고, 한 달 수입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150만~200만원이나 됐다. 그렇게 10년을 부지런히 일한 끝에 그는 정육점 하나를 차려서 난지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창피? 난 거기서 일한 건 하나도 안 창피해. 떳떳하게 땀 흘려 돈 벌었고 그걸로 자식들을 미국 유학까지 보냈어. 쓰레기 더미에 묻힐 물건들을 건져내 재활용한 게 바로 우리라고.” 그는 넝마주이라는 직업을 ‘산업역군’이라고 자랑스레 불렀다.
“지금 공원으로 바뀐 난지도를 보면 경이롭다고나 할까? 인간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지. 애초 쓰레기 따위를 안 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도 먹고살았지 뭐.”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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