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도시로 만들지 못해…”
“그냥뒀다면 더 쓸모”비판도 1967년 말 시작된 여의도 개발은 한강 종합개발의 신호탄이었다. 김현옥 시장이 추진한 여의도 개발의 도시설계는 당시 가장 유력한 건축가였던 김수근에게 맡겨졌다.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이던 김수근은 후배인 윤승중, 김원, 김석철 등에게 이 일을 맡겼다. 68~69년에 걸쳐 이뤄진 이 계획의 핵심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여의도를 서울 도심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선형 도심 가운데 놓는다 △한강 다리와 남북 강변도로를 설치해 서울 강남북의 중심 거리가 되게 한다 △여의도 서쪽 끝에 국회, 동쪽 끝에 서울시청을 배치하고 이 사이의 가로를 여의도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의도 지상에는 차가 다니고 보행자를 위해 2층 데크(보행공간)를 설치한다. 그러나 이런 도시설계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천문학적 비용(20년 동안 1천억원)이 요구됐기 때문에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이 계획 가운데 현실에 근접한 것은 한강에 다리와 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국회를 서쪽에 배치한 것 정도였다. 국회와 시청 사이를 중심 거리로 한다는 핵심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1350m, 너비 300m의 ‘5·16광장’ 조성을 지시함으로써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이 도시설계의 실무책임자였던 윤승중(67) ㈜원도시건축 회장은 “도시계획을 건축적 관점에서 봤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였다”며 “방사선 구조의 서울 도심을 인천까지 이어지는 선형 구조로 바꾸려 했으나, 도심 수요가 적었던데다 잠실 쪽이 개발되면서 주거공간이 많이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설계팀에 참여했던 김석철(62)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대표는 “회한스럽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도시고속도로를 더 육지 쪽으로 들여놓아 시민들의 한강 접근성을 높이지 못한 점과 한강의 물을 여의도 안으로 끌어들여 여의도를 수상도시로 만들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의도 개발에 대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비판도 있다.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서울시 전 부시장)는 “물론 지금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보는 것이지만, 여의도를 개발하지 않고 놓아둬 지금 한강 가운데 나무 우거진 섬이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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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8년 개발 이전 여의도는 양말산과 비행장, 모래톱으로 이뤄진 200만평의 땅이었다. 2. 김현욱 서울시장은 밤섬의 돌과 흙, 백사장의 모래를 가져다 110일 만에 여의도의 둘레 둑 7.6㎞를 완공했다. 3.오늘날 여의도는 국회와 증권거래소 등이 들어서 하루 활동인구 50만명에 이르는 제2의 도심이 됐다. 사진3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사진1·2.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강개발, 1백만평 백사장을 삼키다
홍수땐 밤섬·양말산만 삐죽…일제땐 비행장
1968년 ‘불도저시장’높이 16m 물막이 둑쌓아
말놀던 목장터는 의사당…땅콩밭엔 6·3 빌딩 “당시에는 딱히 여의도라는 것은 없었어요. 엄청 넓은 백사장 안에 여의도 비행장이 있었고, 양말산이 있었고, 밤섬이 있었죠. 그때는 그것들이 백사장으로 다 연결돼 있었죠.” 영등포가 고향인 최종규(53)씨가 기억하는 1960년대의 여의도는 지금과 같은 타원형의 섬이 아니었다. 여의도는 현 여의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비행장의 이름으로만 존재했다. 지금의 국회 본관 일대는 ‘여의도’라는 이름보다 ‘양말산’(養馬山·羊馬山)으로 더 많이 불렸다. 1968년 개발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여의도 일대는 65만여평의 비행장과, 30만여평의 밭, 100만평 가량의 모래톱 등 모두 200만평(현재는 87만평)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밤섬과 서강 사이에는 너비 200~300m(현재 한강 너비는 1000m 가량)의 한강이 흘렀고, 비행장·양말산과 영등포 사이에는 너비 50m 정도의 낮은 샛강이 흘렀다. 그러나 모래톱의 모양과 넓이는 한강의 흐름을 따라 격변했다. 큰물이 지면 양말산과 밤섬 정도만 강물 위로 머리를 들었지만, 가물 때는 영등포에서 밤섬까지, 한강철교에서 양화대교까지가 온통 모래벌판이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해방 뒤의 일이다. 해방 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던 탓에 주변에 민간인들의 주거가 금지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은 양말산 기슭에 20평 남짓한 살림집 50채를 지어 만주·일본에서 귀국한 50가구를 살게 했다. 이들이 여의도의 첫 정착자들이었다. 여의도 1세대 주민 가운데 일부는 군용지나 공유수면 등 60만~70만평을 빌려 땅콩과 옥수수 농사를 지었고, 대다수 가구들은 영등포 쪽으로 막노동을 나갔다. 46년부터 여의도에서 살았다는 박재희(67)씨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방에 밭이 많아서 땅콩·옥수수·파 농사를 많이 지었고, 먹는 데 구애받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의도에서의 삶이 맘 편하고 자유로웠다고 기억했다. 김옥인(66)씨는 “여의도 백사장에서 민들레, 냉이를 캐서 나물을 무쳐먹고,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먹기도 했다”며 “비가 오고 나면 한강철교 아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팔뚝만한 잉어도 자주 잡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1세대 주민들의 여의도 생활은 20년 정도밖에 가지 못했다. 67년 ‘불도저 시장’이란 별명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한강 개발에 시동을 걸었고, 그 첫 사업이 바로 ‘여의도 윤중제 공사’였다. 김 시장은 68년 밤섬의 돌과 흙, 여의도 모래톱의 모래를 가져다 높이 16m, 둘레 7.6㎞의 둑을 쌓고 110일 만에 그 안쪽에 87만여평의 ‘새 여의도’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의도 주민 1200여명(200여가구로 추정됨)은 봉천동과 신정동으로 강제 이주됐다. 봉천동에서는 한 가구당 8~10평 정도의 땅을 제공했으나, 소유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천동·신정동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그 뒤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의도 윤중제가 완공된 뒤 양말산 일대에는 국회가 자리잡았고, 비행장과 땅콩밭에는 방송사과 증권거래소, 증권사들, 63빌딩 등이 들어섰다. 당시 인구가 1천명 남짓이었던 여의도에는 2004년 말 기준으로 1만165가구 2만9591명이 살고 있고, 낮에는 6610개 법인의 4만245명이 일한다. 활동인구는 1일 평균 50만명 이상으로 주거인구의 10배 이상이며, 세금수입은 1년에 3천억원에 이른다. 여의도 개발에 대한 1세대 주민들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김부선(68)씨는 “우리가 살던 곳에 국회가 들어섰고 땅콩밭과 비행장에 훌륭한 건물들이 들어섰으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희(66)씨는 “양말산이나 샛강은 참 좋았는데, 그런 걸 유지하면서 개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김규원 남종영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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