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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홍동면 홍원리에 자리한 홍성은퇴농장. 은퇴 노인 18명이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삶을 가꿔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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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즈음, 새 인생 씨앗뿌리다 “이젠 여기가 내 집이여. 주민등록도 이리 옮겼어.” 팔순을 눈앞에 둔 김경우(79)씨의 주소지는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홍원리 1044번지다. 야트막한 구릉들이 봉긋봉긋한 하원마을의 한 야산 자락에 자리잡은 ‘홍성은퇴농장’이 김씨의 제2의 고향이다. 그는 9년 전 서울 대치동 큰아들 집에서 이곳으로 이사왔다. 전남 광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김씨는 정년 퇴임 뒤에도 재직 당시 활동하던 보이스카우트 일로 쉴 틈이 없이 바삐 살았다. 어느날 지방에 강연을 갔다 돌아오자 온 집안 식구가 모여 있었다. 가족회의를 했단다. “왜, 날 쫓아내기로라도 했냐?”고 농을 섞어 물었는데 맏아들 대답이 그렇다는 거였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직장암 수술에 심장병까지 앓고 있는 아내한테서 “며느리가 내 수발만 해도 눈코뜰새 없는데 친구며 후배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당신 손님치레에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듣곤 수긍이 갔다. 출신직업 다른 은퇴노인 18명
농장 주인 도움속에 농사꾼되기
비닐하우스·사슴농장·과수원·텃밭
쓸쓸하던 황혼…수확물 재미 쏠쏠 사찰 등에 자리를 알아보겠다는 자식들을 제쳐두고 김씨 스스로 머물 곳을 찾아나섰다. 그때 떠오른 데가 친구가 산다는 홍성은퇴농장이다. 산 높고 물 맑은 풍광을 상상하면서 내려와 보니 산도 물도 없고 맑은 공기는커녕 동네방네 축사에서 풍겨나오는 동물 똥오줌 냄새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돌아가려다 친구에게 이끌려 하룻밤 묵은 것이 인연이 돼버렸다. 친구 얘기를 들으니 이곳에서는 취미인 붓글씨를 쓰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먹이란 것이 30~40분 끊김 없이 갈아야 하는 데 집에서는 전화다 손님이다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솔깃했던 건 또다른 취미인 국궁을 할 수 있는 활터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그날로 계약하고 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날마다 글씨도 쓰고 하루가 멀다하고 활 쏘러 나니고 그곳에서 사람들 사귀어 날 저무는 줄 모르고 얘기꽃을 피우곤 하지. 이젠 이곳 사람 다 됐어. 조합장 선거 도와달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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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몇해 전부터는 은퇴농장 주인 김영철(54)씨한테 땅 50평을 빌려 고구마·호박·옥수수·콩 등을 가꾸고 있다. 때마다 찾아오는 자식들에게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딸아이는 아버지가 손수 지은 작물이라고 콩깎지를 벽에 걸어놓고 보고 있단다. 황토층 땅이라 맨발로 작업을 하니 돈 안 들이고 웰빙도 한다. 홍성은퇴농장에는 김씨처럼 도시에서 자식과 함께 살다 시골로 내려와 인생 황혼을 새로 설계하는 은퇴노인 18명이 살고 있다. 남자가 13, 여자가 5명으로, 80대도 셋이나 된다. 교사, 간호사, 호텔 지배인, 전업농 등 출신직업도 각양각색이다. 모두 냉장고·욕실·싱크대·텔레비전·전화기 등이 갖춰진 7~14평짜리 원룸식 독채에서 식사만 빼고 독립 생활을 한다. 1만평 규모의 농장에는 비닐하우스 12동, 사슴농장, 과수원, 텃밭 등이 마련돼 있다. 홍성은퇴농장이 여느 사설 실버타운과 확연히 다른 점은 입주자들이 일을 해 돈을 번다는 것이다. 평수에 따라 보증금 2500만~5000만원만 내면 농장 시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힘든 일은 농장 주인이 다 해준다. 사슴을 키우고 싶다고 하면 사슴 우리를 지어주고, 고구마를 키우고 싶다고 하면 땅을 갈아 고구마를 심어준다. 은퇴농장에는 농사 특공대가 있다. 대장은 평생 농사만 지은 강기원(68)씨. 그는 아내와 사별한 뒤 도시 아들집에 갔다가 못살겠다며 이태 만에 은퇴농장으로 내려왔다. 강씨를 필두로 부산 호텔에서 30년 근무한 유용규(79)씨 등 농사 초보자 할아버지·할머니 4명이 하우스에서 깻잎, 잎마늘, 열무, 오이 등 갖가지 채소를 키우고 있다. 유씨도 이젠 농사꾼이 다됐다. 지난해엔 오이 농사로 달포 만에 140만원을 벌었다. 그날 농장 식구들은 유씨가 낸 턱으로 읍내에 나가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곽병부(70)씨는 부인과 사별한 뒤 충격으로 우울증·실어증에 시달리다 농장에 왔다. 내성적인 성격이던 곽씨는 농사에 취미를 붙인 뒤 농장에서 가장 활기차고 바쁜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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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만(76·여)씨는 지난 가을 평생 남을 추억을 경험했다. 깻잎 따고 포장해 번 돈으로 손녀에게 강아지를 선사한 것이다. 최씨는 “칠십 평생 월급을 타본 게 처음이야”라며 “아직도 기뻐 어쩔 줄 몰라하던 손녀 모습이 선하다”고 말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매주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모두 함께 근처 덕산온천으로 온천욕을 하러 간다. 목욕 뒤엔 수덕사에도 들르고 모처럼 읍내에서 외식을 하기도 한다. 지금은 부부 입주자가 한쌍뿐이다. 부부가 함께 살다 사별한 사람도 있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함께하고 공동작업도 하다보니 홀아비·홀어미 사이에 연정이 오가기도 한단다. 그러나 이곳에선 전혀 흉이 되지 않는다. 여생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가꾸려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홍성/글·사진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농장주인 김영철·박영애씨 부부 10년전 ‘노인 복지시설’ 총각의 꿈
오해빚은 공무원 실라이끝에 성사
몸 불편한 분 수발하는 아내에 감사 홍성은퇴농장은 올해로 문 연 지 10년째다. 정부 지원금 하나 없이 ‘신토불이’ 실버타운이 만들어진 건 농촌 총각의 결혼 약속 때문이다. 농장 주인 김영철(54)씨는 부인 박영애(51)씨에게 청혼을 하면서 “복지시설을 지어 노인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한다. 박씨는 “악한 사람은 아니다 싶어” 승낙을 했다. 1993년 돼지 2천마리를 기르던 김씨가 폐수 문제로 “젊은 공무원에게 머리 숙이기 싫어” 전업을 생각할 즈음 박씨가 청혼 때 얘기를 꺼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김씨는 바로 돼지농장을 정리해 노인들이 묵을 숙소부터 지었다. 얼마 뒤 은퇴농장을 지원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고 농림부에 연락하자 담당 공무원이 내려오겠다고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위에서 연락을 받고서야 건물 지은 것을 뒤늦게 안 군이 호화콘도를 짓는 줄 알고 농지전용 허가를 취소해버린 것이다. 청와대에 진정도 해봤지만 군은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지역신문에 보도되자 검찰이 스스로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잇따라 한 방송에 보도된 뒤엔 군청 전화가 마비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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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호텔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할아버지와 교사 출신의 할머니가 입주하면서 은퇴농장은 본격 문을 열었다. “입주 가족이 낸 돈으로 살지 말고 그들이 생산한 것을 가공·판매하면 먹고 살겠다 싶었습니다. 개를 키우고 싶다 하면 키운 개를 개소주 내서 팔고, 염소 키우면 중탕해서 팔고, 사슴 키우면 녹용으로 팔고, 배추 심으면 김치 만들어 팔면 되겠다 생각했지요.” 초기에는 할머니·할아버지들과 함께 기른 채소를 서울·천안·대전 등지의 120가구에 열흘에 한번씩 공급하는 방식을 썼다. 취미에 따라 분재도 하고 가축사육도 하고 약초도 재배하도록 뒷바라지했다. 그런데 4년쯤 하다보니 노인들이 가축을 못 키우겠다고 했다. 가축 끼니 챙기느라 꼼짝을 못하고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농업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온 아들 경서(26)씨가 “유기농을 하자”고 했다. 밭갈고 씨뿌리고 퇴비하는 힘든 일은 김씨 가족이 맡고 노인들은 아침 서너시간 소일거리로 수확이나 포장일을 도와주면 될 것 같았다. 김씨는 농장 식구들이 기른 유기농 채소로 깻잎절임·고춧잎절임·마늘순절임 등 가공식품으로 만들어 생협에 납품하고 있다. 판매액의 30%는 노인들 몫이다. 한사람이 평균 월 50만원 정도씩은 번다. 생활비 35만2천원을 제하고도 용돈이 남는 셈이다. “힘드냐고요? 어르신들과 얘기하는 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요. 천직인가 봅니다.” 김씨에게는 서울서 직장생활 하다 시골로 시집와 온갖 궂은 일을 마다지 않는 부인 박씨가 큰 버팀목이다. 박씨는 2년 전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김아무개(73)씨에게 꼬박꼬박 하루 세끼를 차려다 드리고 있다. “정이 들면 모두 식구 같으니까 하는 거지요.” 홍성/이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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