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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5 18:08 수정 : 2005.04.05 18:08

조선 순조 때 창덕궁 등을 세밀하게 그린 ‘동궐도’. 조선 왕들은 풍수지리에 맞춰 궁궐에 나무를 심게 했으며, 당시 이들 숲으로 서울 전역은 하나의 생태 네트워크를 이뤘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라진 숲 잃어버린 지혜

하천정비·경지정리·도시건설…
전국 213곳 80% 이상 소멸
숲과 함께한 조상 뜻 알면서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현대 도시인의 아둔함을
나무야 나무야 용서해다오

5일은 제60돌 식목일이었다. 식목일은 조선 성종이 선농단에서 직접 논을 경작하거나 뽕나무를 가꾸던 날을 기원으로 1946년 제정됐다. 1910년 순종은 이날 손수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식목은 인공으로 나무심기다. 우리 조상들은 일찌감치 인공으로 숲을 조성하는 데 능했다. 신라시대에는 ‘허림’이라 하여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등 삼시조와 관련된 숲들을 관리를 둬가며 보존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인왕·백악·남·낙산 등 서울의 4대 산에 100만그루를 심기도 했다.

조선초 서울 4대 산에 100만그루

장동수 한경대학교 조경공학과 교수가 조사한 바로는 이렇게 인공으로 조성된 ‘전통도시숲’(마을숲)은 전국에 213곳에 이른다. 그러나 도시개발·하천정비·경지정리 등 각종 개발바람에 현재 남아 있는 곳은 100여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한두 그루로 숲 이름만 유지되는 곳을 빼면 전통 도시숲의 80% 이상은 소멸했다.

산림청이 숲이 주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 공익기능 가치에서 산림휴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9.7%에서 2003년에는 18.7%로 두 배로 많아졌다. 그러나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전통 도시숲들이 사라진다면 숲이 주는 이바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문화재청이 지난 2년 동안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해 전국의 마을숲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조경가 정조=경기도 수원시를 관통해 남북으로 뻗은 경수산업도로(1번 국도)의 지지대고개 마루에서 옛 도로를 따라 약 5㎞ 구간에 줄나무 형태로 노송 수림대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조가 생부 사도제자의 묘소인 현륭원 관리에게 나랏돈 1천냥을 내려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해 만들어졌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성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일대에는 소나무·상수리나무, 도로변에는 버드나무, 북쪽 농경지에는 과일나무와 뽕나무 등을 심게 하는 등 조선 최고의 ‘조경가’ 면목을 보였다. 정조는 백성들이 나무를 땔감으로 베어가는 일이 생기자 나무에 엽전을 매달아 벌목을 막기도 했다. 송충이가 번지자 정조가 입에 넣어 씹은 뒤 까치들이 모여들어 송충이를 모조리 잡아먹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 〈조선의 임수〉에 실려 있는 경기 수원 노송지대 가로수 모습.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던 능행로를 따라 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왼쪽) 지금은 늙은 소나무 몇 그루만이 옛 자취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80년 중반까지만 해도 200여그루 남아 있던 노송지대는 지금은 50여그루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경기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돼 있지만, 소나무들은 인접한 도로의 차량들이 내뿜는 배출가스로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다.

방재 목적 숲 조성 많아=전통도시숲의 절반 정도는 수해·풍해 등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에 남아 있는 3만평 규모의 상림은 신라 진성여왕 때 치수를 위해 조림한 숲이다. 옛 기록은 함양읍성을 스쳐 들판을 지나는 위천이 해마다 넘쳤는데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와 둑을 쌓아 물을 돌리고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강변 8만평에 조성돼 있는 대밭은 일제 때 잦은 홍수로 농경지 피해가 심하자 주민들이 홍수방지용으로 대나무를 심어 생긴 숲이다. 동학혁명 때 농민군의 참수 장소로도 쓰였던 경남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의 하동송림도 조선 영조 때 광양만 해풍과 섬진강 모랫바람을 막기 위해 1500여그루를 심어 만들어졌다. 그러나 40여 전만 해도 1천여그루에 이르던 노송이 최근에는 700여그루로 급감하고 있다.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의 숲쟁이숲도 법성포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됐다. 쟁이는 ‘재’를 뜻해 숲쟁이는 ‘숲으로 된 성’이라는 말이다.

전통도시숲 형성에 큰 구실을 한 것이 지금의 도로표지판에 해당하는 ‘후자’라는 장승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앞 원표를 기점으로 10리마다 소후, 30리마다 대후를 만들고 후자 주변에 나무들을 심어 표시하도록 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이 발간한 〈조선의 임수〉에는 서울 주요도로변에 반송정숲, 종암로변숲, 양화진도로변숲, 망우로변숲 등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들 숲은 모두 사라졌다.



수구막이숲 생태 네트워크 구성

수구막이숲은 생태 네트워크=조상들이 숲을 만든 또다른 이유로는 풍수지리가 꼽힌다. 예부터 뒤에는 진산이 놓이고 앞에는 트임이 없고 강한 바람을 막을 수 있어야 명당으로 꼽혔다. 이른바 수구로, 이곳을 막을 요량으로 만든 숲들이 적지 않다.

수구막이숲으로 대표적인 곳은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10만평 규모의 황성공원이다. 이 숲은 인공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는 북향 도시로 이 숲은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는 구실을 했다. 수구막이숲의 기능 가운데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대목은 이 숲들이 생태 띠를 잇는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옛 지도에는 현존하는 황성공원 안의 고양수와 유림 외에 좌우로 임정수와 지북림 등이 나타나 있다. 이들 숲이 생태 띠를 이뤄 황성공원은 수렵장으로 쓰일 정도로 산짐승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한양도성도’에는 청계천 하류지역인 동대문 근처에 수구막이 숲이 조성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숲으로 인해 서울에도 생태 띠가 만들어졌다.

천연기념물 지정 진행 중=지금까지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마을숲은 노거수 2그루를 포함해 35곳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곳들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천연수림지가 대부분으로 마을 주변에 주민의 생활문화와 관련된 마을숲이 지정된 경우는 드물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전국 마을숲 47곳을 대상으로 2003~2004년 2년 동안 문화재 자원조사를 했으며, 이들 가운데 문화적·경관적으로 가치가 높은 일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15년째 전통도시숲 연구 장동수 교수

조선 영조 청계천 ‘준첩계천’ 원용
그늘쉼터 위해 가로수 몰아심어야

“태풍 루사가 왔을 때 낙동강 줄기에서 둑 110여개가 잇따라 터졌는데, 한때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낙동강변 숲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과 연관이 깊을 것입니다. 태풍 매미가 상륙한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가 인근 마을과 달리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것은 천연기념물인 어부림 덕택입니다.”

15년째 전통도시숲을 연구해오고 있는 장동수(43) 한경대학교 조경공학과 교수는 마을 주변에 조성된 숲은 각종 재해 방지, 풍치, 종교, 생산 등 주민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현대에도 의미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조선 영조 때 청계천 준설공사 장면을 그려놓은 ‘준천계첩’을 원용해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사업 때 가로수를 5~7m 간격으로 띄우지 말고 몰아 심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여러 그루가 모여 있어야 그늘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진정한 쉼터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며 “서울에서 한여름에 가로수 밑에서 쉬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은 띄엄띄엄 심어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제안을 수원시의 소나무 가로수 조성사업에도 내놓았다.

장 교수는 “우리 조상들이 자신의 농수로에 미루나무 등을 심은 것은 당장 자기 논에 그늘이 지더라도 물의 증발을 막고, 벼꽃이 필 때 바람을 막아내어 마을사람 모두의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서였다”며 “농수로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은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는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드시 도시림연구소 연구를 보면 시 주차장의 나무 1그루가 연간 406달러의 에너지 절약 효과를 낸다”며 “우리도 숲에 대한 정밀한 경제성 분석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을숲을 가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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