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02 15:00
수정 : 2016.12.02 18:20
[인터뷰] 농인 설혜임씨의 촛불집회
|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청각장애인 설혜임씨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박근혜는 하야하라!’라는 구호를 수화로 하고 있다. 맨 왼쪽 사진은 ‘박근혜’, 둘째와 셋째 사진은 ‘하야’, 넷째 사진은 ‘하라’.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음이 소거된 광장을 떠올려본 적이 있는가. 나부끼는 깃발, 일렁이는 촛불과 함께 150만 군중이 동시에 함성 지르는 모습이 완벽하게 묵음 처리된 장면을 감각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가. 그 거대하고 역동적인 공간이 소리에 있어서는 오직 ‘고요의 바다’인 이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광장 안에 함께 있음을 의식해본 일은 있는가.
“가슴이 팡팡 울렸어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5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달 26일, 설혜임(23)씨는 무대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초대형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그는 가슴으로 받았다. 파동은 벅찼다. 그러나 귀에 이르지는 않았다. 의미로 변환되지도 않았다. 그는 농인(청각장애인)이다. 농인은 시각화를 거쳐 소리를 이해하고, 느낌을 재구성한다. 가령 ‘박수’는 청인(비청각장애인)에겐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지만 농인에겐 손들의 반짝임이다. 수화에서도 두 손을 위로 펴고 손목을 돌려 흔드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면 박수 소리는 반짝반짝 빛을 낸다.
혜임씨는 이날 집회에 농인 20여명과 어울려 나왔다. 일상이 그렇듯이,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 의지하는 자리였다. 눈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느꼈다. 다른 감각의 쓰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몸으로 받는 떨림. 스피커의 파동만이 아니었다. 군중이 함성을 내지르면 설씨는 진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것이 함성임을 알 수 있는 건 수화통역사 덕분이다. 통역사가 손으로 “하나, 둘” 수를 센다. 그 순간 이들은 달리기 출발선의 선수가 된다. “셋”이 끝나기 무섭게 외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를 탄핵하라!” 손동작은 어느 때보다 크고 활달했다.
제3의 감각도 있었다. 광장에서 본 청인들의 표정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표정은 차분해 보이는데도 분노했음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건 일종의 ‘기운’이었다. 혜임씨는 거기에서 “분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혜임씨도, 통역사도 거기에 딱 들어맞는 형용사를 수화로 표현하는 데 힘들어했다. 기자가 칠판에 ‘비장함’이라고 쓰자, 표정이 이내 환해졌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 그걸 느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수화통역으로 설명을 들으며 시각적인 느낌을 보태다 보니 상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나도 그 비장함에 동화됐다”고 했다.
혜임씨의 집회 참가는 이날이 두 번째였다. 일주일 전 광화문 4차 집회 때 생애 첫 집회를 경험했다.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잘못에 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무작정 혼자 나갔어요.” 그러나, 지난봄 두 달 동안 혼자 미국 여행을 하고 올 만큼 자신감 넘치는 그도 막상 집회 현장에 가보니 힘겨웠다. 필요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디서 수화통역을 보거나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집회에 녹아들 수 없었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다녀온 듯했다. 5차 집회는 많이 망설여졌다. 아는 수화통역사가 함께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다시 용기를 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서둘러 나선다고 나섰지만, 무대 앞은커녕 당장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이 보이는 곳을 확보했는데, 이번엔 화면 하단의 수화방송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다. 어렵사리 주최 쪽에 연락을 취했다. 얼마 뒤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방송을 볼 수 있게 앞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겠느냐”는 사회자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모세의 기적처럼 앞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틈이 열렸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른 한편으로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수화방송 화면을 크게 잡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했으면 이렇게 미안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대 앞이라고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연을 할 때는 수화통역이 무대나 스크린에서 사라지곤 했다. 시민 자유 발언 때도 수화통역을 잡던 카메라가 광장 군중을 비추면서 수화방송이 자주 중단됐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공연할 때, 혜임씨는 한동안 무대 위 사람들이 뭘 하는지도 몰랐다. 자막을 한참 보고 있자니 노래 가사 같았다. 그들은 ‘민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임씨는 그제야 자막 내용을 수화로 옮겼다. 그의 말로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정보문화누리(장애누리)라는 단체가 2008년부터 노동자대회 등 크고 작은 집회에서 수화통역을 해왔다. 스크린 수화방송은 세월호 집회 때 시작됐다. 장애누리 박미애 간사는 “수화통역에 대한 인식이 차츰 나아져 노동자대회에서는 수화방송 화면이 비교적 크게 잡히고 공연하는 동안에도 빠지지 않는다”며 “집회 주최 쪽의 인식과 의지가 가장 큰 변수”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긴축 반대 시위에서는 수화 통역자가 발언자와 나란히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통역을 했고, 스크린에는 두 사람이 똑같은 크기로 비쳤다고 한다.
“무대나 화면 조금 내주는 걸 시혜로 여기는 게 가장 큰 문제 같아요. 농인도 똑같은 주권자인데, 광화문광장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곳 아닌가요. 농인들은 방송에서 소외돼 있고 정보 접근이 어려운 환경에 있기 때문에 정치 문제에 적극성을 갖기가 어려워요. 광장에서 농인의 정보 접근권이 보편적인 권리로 받아들여지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인 존재로 바뀔 겁니다.” 혜임씨는 다음 집회 때는 무대에 올라 ‘소외가 없는 민주주의’에 대해 자유 발언을 해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의 반짝이는 수화는 광장을 넘어 청와대에까지 쾅쾅 울려퍼질 수 있을까.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통역 김광길 수화통역사
* 장애인정보문화누리는 매주 토요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 수화통역을 제공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 010-4026-3259.
|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청각장애인 설혜임씨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박근혜를 탄핵하라!’라는 구호를 수화로 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박근혜’, 가운데와 오른쪽 사진은 ‘탄핵하라’.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