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9 16:52
수정 : 2005.04.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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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5% 가량 도박 중독에 빠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박 중독을 질병으로 보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도박 중독에 대한 연구와 치료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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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끊지 못하는 기대 ‘도박’
“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 파스칼이 남긴 이 명언만큼 도박의 속성을 정확히 표현한 말도 없다.
빤한 월급으로는 지금의 경제적 형편을 벗어날 수 없기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경마와 카지노에 눈길을 돌린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은 돈을 딸 수 있을 거란 비합리적인 기대가 그들을 도박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몇 해 전, 삼성생명 공익재단에서 발행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도박 중독률은 무려 5%에 육박한다. 도박이 합법화된 미국이나 호주의 도박중독률이 6%대인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도박률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에 속한다.
최근 들어 도박 중독이 이렇게 급증한 데에는 경마와 경륜, 로또와 카지노 등 국가 차원에서 도박을 장려한 것이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선 도박 중독은 알코올 중독처럼 질병으로 보지 않아 연구와 치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한국인 5% ‘한탕주의’ 허우적
주의력 관장 전전두엽에 이상
패 돌릴때 비정상적 흥분감도
도박끊기 실패땐 손떨림 증상
하지만 지난 달 전세계 언론은 아르헨티나 신경학연구소의 프랑코 메네스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도박 중독도 알코올 중독처럼 뇌질환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병적인 도박에 시달리는 도박 중독자들에게서 뇌손상의 징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11명의 도박중독자들의 뇌를 정상인 10명과 비교한 결과, 도박중독증 환자들은 의사결정과 주의력, 자제력 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그로 인해 의사결정을 할 때 불리한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도박중독증 환자들은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불확실한 작은 이익과 장기간에 얻게 되는 큰 이익이 있을 때 예외 없이 불확실한 단기 이익에 집착하는 특징을 보였다. 또 이들은 충동에 대해 쉽게 자제력을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네스 박사의 연구는 도박 중독이 심리적인 집착의 문제가 아니라 뇌기능의 손상을 초래하는 질병이며, 뇌손상과 연관된 만큼 약물요법이 치료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도박중독 환자들에게 우울증 치료제를 투여하면, 도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누그러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강원랜드 같은 카지노를 찾는 고객의 80% 이상이 남자라는 사실 또한 도박 중독에 생물학적인 원인도 관여된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우리 뇌에는 ‘보상 중추’라는 영역이 있는데, 이곳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서 기대하는 보상보다 더 큰 보상이 돌아올 때 큰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열심히 일해서 보너스를 타는 것보다 예상치 못하게 로또에 당첨될 때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영역 때문이다. 설령 로또 당첨금이 더 적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 영역의 반응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여자의 뇌를 이해하면 도박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도박 중독이 뇌 손상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도박 중독 환자들의 여러 가지 증상에서도 나타난다. 도박에 중독되면 도박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같은 흥분감을 느끼기 위해 베팅 단위가 높아진다. 도박을 그만두겠다는 노력이 실패하면 신경과민으로 손떨림 증상까지 나타난다. 도박중독자들이 다시 도박에 손을 대는 것도 이런 무기력 증세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도박 중독자들은 빚이 얼마든 패를 돌리는 순간 가장 행복해 한다. 도박장 의자에 앉는 순간, 빚이 1억이 있어도 행복하다는 것이 중독자들의 한결같은 진술이다. 도박에서 승리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지만, 꼭 이기지 않더라도 도박장에 앉아있기만 해도 즐겁다는 것이다. 중독자들은 때론 회사 돈을 빌리기도 하지만, 따면 금방 갚으면 되니까 절대 횡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박 중독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에도 단도박모임(GA·Gamblers Anonymous)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단도박모임이란 도박 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고백하고 다른 구성원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주는 모임이다.
195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시작돼 전세계로 확산된 이 모임은 1984년 외국인 신부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처음 만들어지게 됐다. 정신과의사들의 치료도 필요하지만, 중독환자들 스스로 서로를 돕는 단도박모임이 도박중독자들에겐 매우 유익하다. 이런 단도박모임이 많이 생기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수라 하겠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및 콜롬비아의대 정신과
교수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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