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20 07:04
수정 : 2017.09.20 07:04
기력한방/하눌타리
십중구담(十中九痰)이란 말이 있다. 질병이 10가지면 9가지가 담음(痰飮)으로 인한 병이란 말이다. 실체론적인 양의학과 달리 순환론적인 세계관의 산물인 한의학은 담음으로 인한 병을 크게 여긴다. 우리 몸은 50~60%이 물, 체액이다. 담음은 이 체액이 움직이지 않고 걸쭉한 가래 같은 것이 되어 몸의 이곳저곳에 고여 있는 걸 가리킨다.
흔히들 신체의 어느 부위에 근육통이 왔을 때 담이 결린다고 하고 탁한 가래가 많을 때 담음이 성하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담음으로 인한 병은 생각보다 심각한 질환이 많다. 심장 부위가 아프면서 등짝이 쩍 벌어질 듯한 증상, 명치끝이 답답하고 툭하면 체하거나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온몸이 아픈 것, 머리가 깨질 듯하거나 극심하게 어지러운 것, 느닷없이 혼절하는 증상 따위가 다 담음 때문이다. 담음이란 단어가 붙은 한의학적 질병 명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얼마전 지인의 시골집을 들렀더니 돌담벽에 하눌타리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더러는 노랗게 익은 것이 태깔만큼은 어느 과일 못지않게 그럴 듯하다. 아쉽게도 식용할 수 없는 열매여서 민간에선 ‘개수박’이라고 부른다. 겉모양새는 그럴 듯한데 실속이 없다는 뜻인 ‘빛깔만 좋은 하눌타리’라는 속담도 있는 게 사뭇 천덕꾸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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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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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물주가 사물을 내놓을 때는 그 쓰임세가 반드시 있는 법. 하눌타리는 반하나 남성 등과 함께 담음을 치료하는 중요한 약재다. 한약명은 과루실(瓜蔞實). ‘동의보감’ 등 옛 의서에 나오는 하눌타리의 효능은 이렇다. 흉비(胸痺)를 낫게 한다, 심과 폐를 윤택하게 한다, 천식과 결흉(結胸)을 낫게 한다. 흉비는 가슴이 그득하면서 숨이 차고 아파서 반듯이 눕지 못하는 병이다. 흉부의 통증이 심해져 등까지 통증이 뻗친다. 이를 심통철배(心痛徹背)라고 한다. 격렬한 통증 때문에 호흡할 때 가슴과 등이 빠개질 듯하므로 숨조차 쉬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현대의학의 협심증이나 관상동맥 질환이다. 결흉은 명치끝이 그득하니 아프고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거리며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오르기도 하는 증상이다. 예의 심통철배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들 흉비나 결흉은 모두 담음으로 인해 초래된 병들이다. 여기에 과루실이 꼭 쓰인다. 증상에 따라 반하나 혜백, 황련, 지실 등의 약재가 배합되지만 과루실이 주된 역할을 한다. 이 과루실이 들어간 처방들은 그 효과가 너무 극적이어서 하루 이틀 만에 병이 호전되는 경우가 많다. 한약은 효과가 더디다는 속설과 달리 그 신속한 치료효과에 놀란다.
역류성식도염 진단을 받고 오랫동안 양약을 먹지만 호전과 재발을 되풀이하다 과루실과 황련, 반하가 든 약으로 치료된 사례도 적지 않다. 본태성 고혈압으로 수십 년간 양약을 복용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찬 환자에게도 과루실이 주효했다. 황금빛깔로 익어서 돌담벽에 탐스럽게 매달려 있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천덕꾸러기 하눌타리 열매가 병을 치료하는 약재가 되면 그 힘이 놀랍다. 하눌타리는 껍질과 씨가 다 있는 전(全)과루를 쓴다. 주성분은 트리테르페노이드 사포닌. 폐암이나 후두암, 복수암 등을 억제하는 항암효과도 있다. 잘 익은 열매에 이 성분이 많다. 덜 익은 것은 약으로 안 써야한다.
김승호(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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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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