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숨진 아산병원 간호사 추모 대자보 쓴 ㄱ간호사
교육 명목으로 괴롭히는 태움 문화
“개인 간 문제로 돌리기 어렵다” 강조
“아산병원 간호사 1명에 환자 12~14명
‘비용 탓’ 인력부족이 태움의 근본 원인
퇴사 아니면 이렇게 안타까운 일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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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모습과 고 박아무개 간호사 동료 간호사들이 붙인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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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아무개 간호사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죽음입니다.’
지난달 28일 서울아산병원 앞에 고 박아무개(27) 간호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흰 리본과 함께 에이포(A4) 용지 2장 분량의 대자보가 붙었다. 지난해 9월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한 박아무개 간호사는 지난달 15일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고 박아무개 간호사의 2017년 9월 입사동료, 모 신규 간호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이 대자보는 “본 사건의 원인이 단편적으로는 신규 간호사에 대한 높은 연차의 간호사의 ‘태움’(간호사의 교육을 명목으로 괴롭히는 문화)으로만 비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간호사 근로 환경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꼬집었다. 또 “(서울아산병원은) 본 사건에 대해서는 고인에 대해 ‘예민한 성격’ 및 ‘우울한 성격’이었다는 근거 없는 답변으로 유가족에게 상처만 남긴 채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며 △신규간호사 자살사고 진상규명 △재발방지대책 마련 △서울아산병원 간호부에서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을 것 등을 요구했다. “불편한 침묵을 깨 달라”며 간호사들에게 “용기 내 목소리를 높여달라”고도 덧붙였다. (
▶관련 기사 : “병원 관둔다던 애가 왜 죽었나” 아산병원 간호사 유족의 분노)
대자보를 작성한 ㄱ간호사는 5일 <한겨레>와 만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누군지) 알려지는 것도 무서워요.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게 더 두려웠어요.” 대자보를 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ㄱ간호사는 이어 “신규간호사 한 명이 목숨을 끊었는데 병원에서는 아무 대응 없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 같다. (사건이) 이대로 묻히면 어쩌나, 조용히 넘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다면 같은 일이 또 반복될텐데 그땐 어떡하나, 그런 점이 가장 두려웠다”며 “제2, 제3의 박 간호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박 간호사도 제2, 제3의 누군가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병원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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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하다 설 연휴 선배를 만나고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박아무개 간호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에서 열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간호사들이 첫마음을 되새기며 다시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있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한 목소리로 간호사 안 가혹행위인 `태움' 문화 근절을 촉구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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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움’ 문제, 선배vs후배 간호사 구도 아닌 인력 부족이 원인”
이번 사건으로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태움’ 문화는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신규 간호사들을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괴롭히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ㄱ간호사는 “(박 간호사 사건에 대해선) 일방적인 괴롭힘이 있었는지 분명 밝혀져야 하지만, 이 사건 자체가 ‘가해자인 선배 간호사 대 피해자인 후배 간호사’ 이런 구도로 단편적으로만 비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고질적인 인력부족으로 과중하게 쏠리는 업무 부담과 그로인한 스트레스가 ‘태움’ 문화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업무부담이 집단 괴롭힘을 정당화할 순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개인의 잘못으로만 원인을 돌리는 걸 경계했다.
“‘태움’ 문화는 단순히 개인의 성격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예요. 근본적인 건 결국 인력 문제인데, (간호사 1명이) 너무 많은 환자를 보고, 일이 과중하다 보니까 신규 간호사한테도 혹독한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는 거죠. 아산병원의 경우 중환자실은 간호사 1명이 환자 3명을 보고, 일반 병동은 간호사 1명이 환자 12∼14명을 보는 것 같아요. 프리셉터(교육) 기간이 끝나면 (신규 간호사들은) ‘독립’을 하는데 처음부터 일을 (능숙하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독립하자마자 12명 가까이 되는 환자를 맡아야 해요. 저희도 부족한 기술을 빨리 익히기 위해 퇴근한 뒤에나 오프(휴일) 때나 공부를 하는데 (적응할 때까지) 훈육의 일종으로 혼나게 되는 거죠.”
실제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전국 110개 병원 노동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2016년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를 보면, “현재 근무하고 있는 부서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82.6%에 달했다. “인력부족으로 건강이 악화됐다”는 응답은 69.8%, “인력부족으로 환자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응답은 76.6%였다.
인력 부족과 업무 과중은 간호사들의 높은 이직률로 직결된다. 한국의 신규간호사 이직률은 33.9%에 이른다. 신규 간호사들을 많이 뽑아도 손이 모자라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셈이다.
보건의료노조는 “병원에게 인력은 비용이지만 환자에게 인력은 안전이고 생명”이라며 “너무나 열악한 근무환경과 직무스트레스, 태움 때문에 70.1%의 간호사가 이직 의향을 갖고 있는 현실은 그만큼 환자들이 의료사고와 안전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ㄱ간호사는 “간호사 한 명 당 담당하는 환자 수를 줄여야 한다”며 “병원 쪽에서는 돈이 들어가는 문제니까 잘 안하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 (관련) 법을 마련하는게 필요하다”고도 했다.
현재 국회에는 간호사 등 보건의료 인력기준을 세우고 이를 준수하도록 명시한 ‘보건의료 인력지원 특별법’(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윤소하 정의당 의원) 2건, ‘직장내 괴롭힘 금지’를 명시한 ‘근로기준법 개정안’(한정애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돼 있지만 3년째 계류 중이다.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1월 간호인력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간호인력의 양성 및 처우 개선에 관한 법’을, 강병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의료기관 내 인권 침해를 방지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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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아무개 간호사 죽음을 추모하는 흰 리본. ‘비단 아산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적혀있다. 서울대병원 최원영 간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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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시간 일하곤 해...12시간 일하면 행복한 정도”
고 박아무개 간호사는 오후 1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5시에 퇴근할 정도로 극심한 업무량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ㄱ간호사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신규 간호사가 12시간 일하면 적게 일한 거예요. 16시간 일하다가 14시간 일하면 좋아요. 12시간 일하면 정말 행복하고요. 출근 전부터 엄청 불안해지고, 생리불순은 흔하죠. 저희가 못하면 선배 간호사 분들이 저희를 도와주느라 (자신의) 일을 못하게 되니까 그 부분이 죄송하죠. ‘난 또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구나’란 자책감을 느껴요.”
보건의료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짧은 기간의 신규 간호사 교육시스템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ㄱ간호사는 “프리셉터(교육) 기간이 일반 병동은 8∼9주 가량, 중환자실은 12주 가량 밖에 되지 않고, 기간이 끝나면 바로 독립해 다른 선배와 같은 규모의 환자를 담당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간호사 고용은 많이 하는데 힘들어서 나가는 분이 많다 보니 항상 (그 수가) 부족해요. 간호사들이 공장에서 새로운 기기를 찍어내는 것처럼 뽑는다고 다 일을 바로바로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교육시스템이 유지되면 (같은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죠. ‘퇴사’ 아니면 이번 사건처럼 안타까운 일밖에 (간호사들로선) 해결책이 없어요.”
외국의 경우 간호사가 충분한 임상실습을 하기 위한 시스템이 마련돼있다. 미국은 신규 간호사의 병원적응을 돕기 위해 약 1년 동안 1대1 멘토를 지원하고 발전단계별로 임상실무를 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간호사 레지던시 프로그램’(Nurse Residency Program)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신규 간호사에게 졸업한 뒤 임상훈련을 제공하는 것을 법에 명시해 의무화하고 있으며, 정부는 모든 의료기관에 교육훈련 비용을 부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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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앞에 걸린 흰 추모 리본과 대자보. 서울대병원 최원영 간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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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은 왜 침묵하나요? 내가 죽어도 똑같이 모른척 할 것 같아요.”
“병원 쪽에서는 적어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도의 입장은 밝히는게 상식적이지 않나요?” ㄱ간호사는 되물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사과는 커녕 침묵하기만 하는 병원에 대한 좌절감이 배어있었다.
“‘누구나 힘들다’, ‘버티면 된다’ 이걸 너무 당연한 것처럼 알고 살아왔는데, 이번 사건이 제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병원은 왜 이런 사태를 가만히 보고 있지? 왜 바꾸려고 하지 않았지?’란 의문이 들더라고요.”
ㄱ간호사는 “저도 결국 (박 간호사와) 같은 입장이지 않나”라며 “제 목숨의 가치까지 가벼워지는 것 같다”고도 털어놨다. “내가 죽어도 똑같이 이렇게 모른 척 할 것 같아요.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병원의 대응을 보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있지?’ 싶었어요.”
병원은 침묵했지만, 간호사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자보를 보고 뭐라도 돕고 싶다며 연락해온 동료들이 있었다. 지난 4일 광화문에서 열린 추모집회에도 300여명의 간호사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고 박 간호사를 추모했다.
“‘힘들게 고통받다가 자살한 간호사를 모른 척 하는 동료 간호사’란 죄책감, 그걸 안고 사는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어요. 죄책감이 제일 커요. 이런 일이 일어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동료인 저희가 같이 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는 “다들 일하느라고 너무 바빠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서도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에겐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비쳤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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