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15 22:23
수정 : 2006.02.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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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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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말과 내용이 따로 가는 경우가 많다. 1월23일 방송위원회가 발표한 ‘선거방송심의에 관한 특별규정 개정안’이 딱 그렇다. 새롭게 고쳐 정한다는 ‘개정’이라는 말에는 ‘바르게’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건데, 이 개정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개악안으로 이름 바꿔야 할 것 중에 가장 악독한 것은 후보자 방송출연 제한조항을 그대로 둔 대목이다. 제20조는 “방송은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법의 규정에 의한 방송 및 보도 토론 방송을 제외한 프로그램에 후보자를 출연시키거나 후보자의 음성 영상 등 실질적인 출연효과를 주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정해놓았다.
방송프로듀서연합회뿐만 아니라, 문화연대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등 시민사회는 토론회, 1인 시위, 이의제기와 같은 경로를 통해 이 조항의 폐지를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 방송위는 작년 7월 후보자 출연 금지를 연예오락프로그램에만 국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을 풀기로 한 것이다. 개정 공청회 과정에서 표출된 학계와 법조계, 시청자 단체의 의견을 고려했을 때 다행스럽고 합당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이 엉뚱하게 사회적 합의에 딴지 걸고 나섰다. 선거의 중립성을 훼손하고 방송의 편파성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말할 자격이 전혀 없는 보수 정치권의 고소를 금치 못할 노파심이다. 문제는 권력으로부터 방송 자율성, 표현의 자유, 시청자 알권리를 지켜야 할 위원회가 이런 외압을 빌미로 슬그머니 꼬랑지를 내려버린 점이다. 후보자 출연제한 독소조항을 존속시킨 개정안을 2월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상식의 기대를 완전히 무효화시켜 버린 것이다.
언론자유에 대한 모독, 정치권 눈치 보기의 전형이라는 각계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하다. 시대착오적 발상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진들의 결연한 선언도 지극히 정당하다. 정치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벙어리’ 프로그램은 방송으로서의 자격, 존재의의가 없다. 그런데 방송위원회와 정치권은 이상하게 그런 부실 방송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시사투나잇>, <추적60분>, <피디수첩>, <손석희의 시선집중>, <그것이 알고 싶다>, <똘레랑스> 등 한국 방송의 결정적 프로그램들에 대한 명백한 재갈물리기다.
자유의 구속, 검열 통제다. 대체 뭐가 두려운가? 보도와 시사교양을 구별하는 낡은 인식 틀을 고집하고, 제작자와 진행자의 자율성을 무단 침범하며, 시청자의 시민적 판단력을 사전 차단하는 심의규칙은 잘못된 것이다. 기자만이 ‘언론인’이라는 허튼 선입견, ‘정치 따로, 문화 따로’의 얕은 편견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편파적이고 그래서 ‘중립성’을 해친다면, 심의 즉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정확히 책임을 따지면 된다.
움직일 때다. 소중한 공적영역, 개방된 정치무대가 위로부터 강제 철거·축소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방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반칙의 무능한 방임이다.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자유무역협정과 스크린쿼터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한참인데, 민주정의를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민주방송, 공정방송은 소수 정치인이나 거대 방송위가 아닌, 자율적 생산자와 비판적 시청자의 몫이다. 가잖게 끼어들지 말라. 개악 말고 개정하라.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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