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01 21:41
수정 : 2006.03.0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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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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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제도언론과 사이버 공간은 태생이 다르다. 제도화된 언론의 메시지는 대개 상식과 이성에 입각한다. 사실을 보도하고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도 절제되고 논리적이다. 공론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도언론에 견주자면, 사이버 공간은 풍자의 놀이터에 가깝다. 세상 풍조에 대한 비틀기를 일삼다 보니 오가는 대화에 비방이나 욕설이 섞이기도 한다. 토론이 벌어진다고 해서 그 지향점을 합의에 두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토론의 장에 내놓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노는 물이 다른 제도언론과 사이버 공간은 각자 해야 하고 잘 할 수 있는 몫이 따로 있다. 서로 본분을 지킬 때 둘 간의 앙상블도 이루어진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1인 시위가 방송과 신문을 달구던 와중에 제주도 귤 농사꾼이 진보적 성향의 한 인터넷언론에 글을 올렸다. 영화와 광고를 통해 미국산 주스를 예찬한 영화인들이 ‘문화 주권’을 외치고 정부 훈장을 반납하는 이율배반을 꼬집는 풍자의 글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적절한 도구로 영화인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한 부조리한 관습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는 영화인과 농민이 서로 처지를 이해하고 앞으로 같은 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풍자’란 용어의 출전인 <시경>은 “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전한다. 사이버 공간의 풍자가 전도된 세태를 들추고 영화인들은 <시경>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도언론은 그 결과를 차분한 호흡으로 압축해 매개했다. 지난달 중순 영화배우 최민식씨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를 위한 농민대회에 참석해 농민들에게 큰 절을 하는 장면을 <한겨레>가 큼지막한 사진으로 담은 것이 그렇다.
한편, 사이버 공간과 다른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간하지 못하는 제도언론은 경거망동할 뿐이다. 이 경우에서 <조선일보>만한 반면교사는 없는 듯하다. 영화인들의 1인 시위를 다루는 <조선>의 기조는 “대학 때조차 머리띠 한번 둘러보지 않았을 듯한” 그리고 “외제차에 명품만 찾던” 영화인들이 아니꼽다는 것이다. 이는 제도언론이 수행하는 품격 있는 문제 제기가 아니다. 인신에 대한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날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풍자도 아니다. 기지 넘치는 비판도 아니고 들추어내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도 모호한 탓이다. 그저 사이버 공간에서나 통용될 법한 독설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은 온갖 의견이 공존하는 사이버 공간의 담론 질서를 제멋대로 유린한다. 무수한 인터넷 언설 중에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이를 촘촘히 소개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한 웹진에 올라온 “쌀과 영화의 부적절한 만남”을 빌려와 이는 “불행한 이별을 낳는 법”이라고 맞장구친다. 의견은 자유고 편집이야 알아서 행사하는 권리라지만 자칭 ‘일등’ 신문의 선택이 영화인과 농민을 이간질하는 일개 인터넷 의견의 재매개를 통한 확대 재생산이라니…. 사이버 공간에 부유하는 일방의 악의적 담론을 마치 정론이라도 되는 양 부각시키는 제도언론은 몰상식하다.
지난달 26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조선>과 상종하기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수의 영화 제작자들이 이렇게 작심했을 저간의 사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재영(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jaekim@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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