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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7 18:48 수정 : 2005.02.17 18:48

공자의 말씀 가운데 “나라가 튼튼하려면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며 공신력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하나를 뺀다면 군비요, 또 하나를 뺀다면 식량이다”는 말이 있다. 결국 공신력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건실한 경제와 막강한 군대도 중요하지만 사회통합이 한 나라의 국력을 가늠하는 요소가 된다는 뜻일 터이다. 사실 그렇다. 사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제와 군대는 사상누각이다. 서로가 믿지를 못하는데 경제가 바로 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명분과 가치를 중시하는 군대의 전력은 공백을 면치 못한다. 즉 가치와 명분 그리고 신뢰를 구축하는 요소로서 사회통합이 한 나라의 국방을 좌우한다는 공자의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통합이라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뭐니 뭐니 해도 언론이다. 언론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의제 설정 기능이 바로 그것 아닌가. 문제는 그런 탁월한 기능이 편파와 왜곡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에 대한 감정적 반발심이 여전한 수구신문들의 의제 설정은 누가 봐도 저주의 수준이라는 판단은 어렵지 않다. 오죽하면 제1야당의 원내 부대표가 ‘이제는 노 대통령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겠는가?

감정적 반발심에서 비롯된 의제는 결국 막말로 나간다. 또한 분열과 갈등의 주범 노릇을 할 뿐 사회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서는 합리적인 논리와 지적 성찰은 사치스럽다. 극단적인 배타성을 띤 일방성과 이분법적 논리가 판을 치고 상대방은 금세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는 ‘할 말은 하는 신문’으로 화려하게 포장되어 수구세력들에게 애국세력으로 인식을 시킨다. 그러면서 상생을 말하고 사회통합을 외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수구논리 속에는 항상 먹고사는 경제논리가 우선이다.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인간의 기본권이기에 가타부타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본질에 대한 호도다. 그들에게 있어 역사적 그늘이 되었던 ‘식민지 근대화론’과 ‘군사독재 정권의 개발독재 논리’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논리적 배경 때문일 터이다. 그렇기에 지율 스님의 단식도 “21세기의 봉건영주”(조선일보 2월 12일치 변용식 칼럼) 범주에 들어간다. 생명을 건 순결한 영혼의 메아리도 원리주의자로 둔갑하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파렴치한으로 매도된다. 전혀 도움이 안 돼 하나마나한 북한 인권을 느닷없이 들먹여 본질을 흐리는 용기가 참으로 놀랍다.

이제껏 한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왜곡된 과거사의 성찰과 반성에 대한 수구신문들의 반발은 참으로 치졸하다. 왜곡된 역사는 왜곡된 가치를 낳는다. 그런 면에서 과거 청산은 개혁과 사회통합의 전제다. 해방된 지 60년이 된 지금까지 친일파의 땅 문제가 제기되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수구신문에는 “대한민국은 성공한 역사다”(조선일보 1월 26일치)라는 표제어가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성공한 역사는 정의와 진실이 담보된 역사지 왜곡된 역사는 아니다. 최근 광화문 현판과 영화 등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집중된 과거사를 두고 수구신문들은 일제히 “박정희 죽이기”라는 불순한 음모론으로 둔갑시키며 정치적 의제로 이끌고 간다. 또한 박정희의 최대 공적인 경제로 노 정권과 여당을 압박하며 노 대통령을 ‘경제 대통령’으로 호칭하는 모양새가 그렇게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일보 1월 27일치 박지만씨의 인터뷰 기사와 4일 후, 김대중 칼럼에서 그들은 서로 입이라도 맞춘 듯 비슷한 표현을 썼다. “솔직히 그 사람들 열등감 같아요”, “그렇게 자신이 없냐?”는 식이다. ‘죽은 지 30여년이 다 돼가는 박정희 한 사람이 그렇게 두려우냐’는 도무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내용이지만 느낌으로 와닿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실패한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거.

이주현/경기민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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