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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6 20:06 수정 : 2006.08.16 20:06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미디어전망대

현대가 고대나 중세보다 나은 사회라면 그 첫 번째 이유는 비로소 인권을 존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엔 헌장도, 대한민국 헌법도 모든 인간의 존엄성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인권은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별하는 척도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파수꾼임을 자처한다. 그러니 언론이 인권을 취급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일어난 두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 언론은 외면으로 일관했다. 그는 지난달 16일 한 파업 지원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해산 과정에서 다쳤다. 그리고 보름여 뒤에 숨을 거두었다. 그 뒤 또 보름이 지났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은 하씨의 부상과 죽음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본말을 전도해 의미를 탈색하는 데 앞장섰다. 주로 이런 식이다. 하씨 사망 원인에 대해 경찰 쪽 발표만을 중계한다(하중근씨 넘어져 사망한 듯, 〈매일경제〉). 하씨 사망을 규탄하는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또 포항 충돌…시위 해산 과정 격렬한 몸싸움, 〈조선〉). 이로 인해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폭염 속 또 폭력시위…포항 부글부글, 〈동아〉) 생계에 타격을 받는다고 강조한다(포항경제 거덜 나겠네, 〈한국경제〉). 제 나라 노동자의 인권은 이들 언론의 안중에 없다.

하씨 사망의 계기가 된 포항건설노조의 포스코 본사 농성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주검이 될 순 없다. 아직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일이라고 둘러대지 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공권력이 개입된 시민의 죽음이다. 그럴수록 사인을 규명하는 데 발 벗고 나서는 것이 언론의 책무다.

프랑스인 집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두 아기 사건에 대한 언론의 집중 조명은 하씨 사망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사건 자체가 엽기적이어서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뉴스가치는 물론 보도할만한 내용도 없었다. 온갖 추측(산모 복수극? 프랑스인 공모극?…세 가지 시나리오, 〈세계〉)과 섣부른 단정(유기 영아 산모 신원 확인…“프랑스인 C씨 아내 아니다”, 〈국민〉)으로 귀한 지면을 허비할 뿐이었다. 또 이 과정에서 누가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다느니(프랑스인 아내, 2003년 말 자궁적출 수술…잘못된 출산 탓 감염 후유증?, 〈조선〉), 어떤 이의 여성관계를 파악했다느니(‘냉동고 아기’ 친부 주변 여성 3~4명 유전자 분석, 〈한겨레〉) 호들갑 떨면서 당사자들의 인권을 휴지조각 취급했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였다고? 알권리란 개인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공중의 사회적 현안을 제대로 파헤치라고 부여한 것이다. 언론은 보도의 자유가 있으니 시비 걸지 말라고? 표현의 자유란 무책임한 추측 보도를 일삼으라는 게 아니라 진실 보도를 보장하기 위해 허용된 것이다. 언론 보도라고 인권 침해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공권력에서 비롯된 죽음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보도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인격권도 함부로 짓밟는 21세기의 대한민국 언론. 이들이 주름잡는 사회에서 인권 존중이라는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론이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jaekim@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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