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07 18:13
수정 : 2005.04.07 18:13
‘아마조네스’를 들어보았는가? 서울시가 프로축구단 창단을 목적으로 꾸민 이른바 ‘축구발전 지원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실업 여자축구팀 이름이다. “불모지인 여자축구를 지원키로 결정했다”, “‘경평 여자축구대회’의 정기적 개최도 적극 검토하겠다”며 서울시가 찬란한 청사진을 쏟아냈다.
<연합뉴스>는 “한국 여자축구가 서울시의 실업팀 창단 발표로 세계 강호로 거듭나기 위한 날개를 달게 됐다”고 과장되게 응수한다.
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면 뜨거운 관심이 몰렸다가도 금새 그 열기가 식어버리는 비인기종목들”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비인기종목 스포츠팀을 늘린 서울시를 띄운다.
그러나 그뿐이다. 모두가 냉담하다. 같은 축구라도 대접이 한참 다르다. 팀은 전국여자종별축구선수권대회 일반부에서 창단 7개월만에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아마조네스’는 이미 뉴스 관심사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우승 소식을 언급한 것도 서울의 일간지가 아닌, <강원일보> 달랑 하나뿐이다.
최근 팀원 한 명이 자살을 해도 한번 정해진 냉대와 무관심의 구조는 좀체 바뀌지 않는다. 여배우가 목숨을 끊었을 때, 여승무원이 납치 살해되었을 때 난리 법석이던 바로 그 신문과 방송이 이 사건에 관해서는 어떤 연민이나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인을 호들갑스럽게 캐물으려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음모적이라고 할 정도로 죽음에 관해 침묵한다.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태도다. 촘스키의 말대로, 가치 있는 희생자와 가치없는 희생자가 따로 있는 것인가?
<중앙일보>가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엄마와 감독님께 죄송해요”라는 유서를 남겼다며 짤막하게 단신 처리한다. <경향신문>도 경찰이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라는 상투적인 언어로 결론을 맺는 게 고작이다. <연합뉴스>의 경우에는, 그녀가 “삶의 중압감을 못 이겨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도무지 뜻이 확실치 않은 추측성 말투로 횡설수설한다. <에스비에스>만 “여배우의 죽음으로 세상이 눈물짓던 지난 주, 한 축구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로 조의를 표했다.
월드컵에 대해 뜨거운 매체의 너무나 차가운 반응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30일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아시아 최종 예선 경기는 시청률 34%를 기록했다. 월드컵 축구를 보고 즐기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는가? 사실 올해에는 북한의 시합까지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구경하는 기쁨이 컸다. 현지 주민들은 아쉽게 녹화 편집된 경기를 봤다지만, 축구에 매료된 평양 시민들의 이미지가 이렇듯 외부로 소개되는 것은 현재와 같은 한반도 긴장 상태를 누그러뜨리는 데 분명 효과가 있어 보인다.
방송사가 돌아가며 중계함으로써 중복 편성 관행에서 벗어난 것도 보기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의 구조화된 남성 월드컵 축구 중심주의는 우려할 만하다. 상처와 후유증이 너무 크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현실이 신문으로부터 버림받는다. 텔레비전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야에서 지워진다. 의미 있는 사건조차 우리의 감각 영역에서 멀어지고, 결국 남의 일처럼 가볍게 처리된다.
그런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월드컵에 들떠 이웃의 비참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를 유기했던 신문과 방송은 이제는 최해란이라는 채 꽃피지 못한 젊은 영혼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축구선수의 자살이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누스 얼굴을 한 월드컵 공화국의 구조적 모순, 비극적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신문과 방송은 태연스레 무시해버린다.
요컨대 총체적 냉대가 원흉이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호가 무색하다. 월드컵 경기장들은 화려하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구 예선전과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들, 그리고 이를 스펙터클하게 중계하는 텔레비전은 더욱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가까운 그늘의 안타까운 죽음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화려함이기에 잔인하고 또 무섭다.
전규찬/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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