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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3 21:04 수정 : 2005.01.13 21:04

미국의 독특한 정치문화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 토크쇼에서 진보적인 소리는 왜 맥을 못 추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로저 크레이버의 분석은 자못 흥미롭다. 진보적인 성향의 진행자들은 ‘품위’와 ‘체면’을 찾는 엘리트주의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품위와 체면’이란 합당한 논리와 원칙을 고수하려는 책임있는 자세의 또 다른 표현일 터이다. 결정적일 때, 품위와 체면을 팽개친다는 점에서 미국의 보수층과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이른바 4대 개혁입법안은 수구신문들에게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자신의 정체성과 아울러 착취구조의 와해를 불러올 수 있는 구조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결사적으로 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분열과 갈등, 그리고 불황의 주범으로까지 몰아세우며 막아내려던 법안 가운데 신문법이 통과되자 칼럼과 사설을 통해 격한 감정들을 토해냈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하지 못했던 ‘신문규제법’을 민주화됐다는 이 시대에 만들어냈다”(조선일보 1월 10일치, 김대중 칼럼). “비판신문을 제압하기 위해 독자가 자유롭게 신문을 구독할 권리마저 제한하는 것부터가 기네스북 감이다”(조선일보 1월 3일치 사설).

격한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야 나무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나라의 일등신문이라면 적어도 앞뒤는 맞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정부에서 내보낸 검열관이 신문사에 상주하고 더구나 신문사 스스로 알아서 비위를 맞추던 때에 무슨 법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스스로 ‘비판신문’이라고 하기엔 과거가 너무 켕기지 않은가. 이 시간에도 집집이 상품권을 돌리며 구독을 구걸하며 신문시장을 황폐화시킨 주범이 누군데, 구독의 자유 운운할 주제나 있는 건가.

언론재단 이사장 하나 갈아 치우지 못하는 권력자지만 수구신문들은 지난 2년여의 재임기간을 ‘탈레반식 정치’로 규정한다.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송년만찬에서 “나로서 비롯된 일이 너무 많았다”라는 말이 수구신문에서는 “트러블 메이커”로, “혁명, 타도, 숙청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흉측한 갈등의 생산자”로 둔갑한다. 이들이 과거 독재자들에게 어찌했는가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의 고백으로 촉발된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의 이른바 ‘구치 핸드백’ 파문은 언론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입장에서 엄청난 충격이고 안타까움 그 자체다. 아무리 상황이 그러했고, 이 기자의 양심고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일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언론인의 윤리의식을 다잡고 심기일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게 사실, 이 사건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 아닌가.

그러나 수구신문들에겐 다르다. 인신공격에 이어 그들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의 진위공방까지 나아간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진위공방을 하는가? ‘뉴스서비스 사실은’을 패러디하며 선물을 받은 시기와 돌려준 시기의 진위공방을 통해 사건을 부풀려가는 모양새는 아무리 봐도 분풀이로 밖에 안 보인다. 그게 수구신문의 한계인 모양이다. 역시 체면도 품위도 다 팽개친 모습이다.

요즘, 감리교단의 대형교회 모 목사의 새해 첫 주 설교가 세간의 화제다. “지진해일 희생자는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이란다. 이어 “국보법이 폐지되면 나라가 자연히 공산화된다”고 했단다. 신앙과 지적 성찰이 결여된 선동구호 같은 설교지만 그게 먹혀들어가는 구조에 놀랄 뿐이다. 그분은 무슨 때마다 시청 광장에 교인들 동원해서 성조기를 흔들며 기도하던 분이다. 그 덕인지 몰라도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감사장까지 받았다. 대기업보다 떨어진 종교계의 신뢰도(1월3일치 조선일보)가 괜한 소리는 아니다.


부패한 종교계나 수구신문이나 내용만 다를 뿐, 그들의 표현 속에 드러난 정체는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만큼 중증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주현 경기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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