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30 17:00
수정 : 2005.06.30 17:00
100회를 맞이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방송사 내부 소수자의 역사에 대한, 사회를 위한, 민중을 향한 반성문이다. 과거의 불량함에 대한 중대한 양심선언이다. 보다 큰 모순이 배태한 언론 모순, 매체 모순에 대한 고해의 몸짓이다.
한 피디가 자신의 작업을 ‘보상적 실천’으로 이름 붙인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제주 4·3으로부터 시작해 실미도 특수부대, 인혁당 사건, 보도연맹, 국가보안법, 반민특위, 김재규, 12·12와 미국 등 은폐되고 조작된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보도하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반성의 목소리를 꾸준히 높였다. 그럼으로써 유혹적 선전, 선정적 뉴스가 득세한 텔레비전 영토 내 드문 전복의 공간, 저항의 시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공론의 넓이를 확장시키고 깊이를 심화시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문화정치적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국가 독점의 단일 역사, ‘국민’ 중심의 균질 사관을 해체시킨 성과는 수구 신문과 정당의 집요한 시비로 반증된다.
이제 앞으로가 문제다. 자본의 시대 진지한 기억의 부활, 증언의 촉발, 발언의 해방을 도모할 시·공간으로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스스로의 혁신이 필요하다. 과거를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먹여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강제가 아닌 유혹으로, 억압이 아닌 외설로 망각을 부추기는 권력의 코드에 맞설 대책의 마련이다. 지체된 진실, 유보된 증언을 내 놓는 것으로 만족할 시기가 아니다. 과거지사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말한다는 결기로 충분하지 않다.
발언의 행방을 과거가 아닌, 위태로운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진보의 선을 확실히 다지는 일이다. 신념과 욕망, 의식과 주체성의 가차 없는 표현 및 공감 영역확대가 진보의 지향점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바로 이 ‘부단하게 앞서 나감’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계속 생존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죽음이다. 주류화의 방심, 수구화의 늪, 기회주의적 타협의 나락뿐이다.
악화된 방송환경 하에서, 주류의 유혹 속에서 피디저널리즘이 그 변이성과 성찰성, 급진성을 고수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386과 그 이전의 소수 의식 있는 피디들로 구성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재생산될 수 있을지조차 보장이 없다. 100회를 축하만 할 수 없는 것도 이런 불투명성 탓이다. 심화될 위기 타개책 고민의 다급한 숙제가 남는다.
진보의 각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역사적인 의제를 지속 발굴하며, 유효한 언어로 청년 핵심 세대와 소통코자 하는 움직임 즉 운동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 국경을 모르는 자본, 전쟁에 미친 제국을 아 세계를 여행하는 것도 급선무다. 사건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여성과 지역,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억압된 주체의 삶과 연관된 주제들을 적극 계발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 문제를 다룬 게 정인숙 사건뿐인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끊임없이 갱신하는 권력의 본질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의 비리, 재벌의 범죄, 제국의 폭력에 침묵하는 것은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재구성은 결코 피디의 몫이 아닌, 우리의 책임이다. 일개 프로그램 혹은 방송사의 선택이 아닌, 역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100회의 문턱을 넘으니 더 큰 노역이 기다린다.
전규찬/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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