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의 왜 한겨레냐면
영리한 사회에서 어리석게 사는 이들이매를 맞더라도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한겨레의 건강성이 한국 사회의 건강척도라
믿는 까닭입니다
냉혹한 자본시장에서 희망의 거처는
당신의 시민의식뿐입니다. 뜨거운 열풍과 장맛비가 교차한다. 후텁지근한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스친다. 남산이 바라보이는 신문사 옥상 귀퉁이에서 잠깐 숨을 돌리는 기자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영리하게 내달릴 때, 박봉의 한겨레를 선택한 그들이다. 그런 그들이 한겨레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풀죽어 있는 모습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매를 맞더라도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외려 내가 힘을 얻는다. 우리 사회를 위해, 아니 영악한 사회를 어리석게 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한겨레 제2 창간 운동은 성공해야 한다. 〈한겨레〉는 내 소망을 이루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귀국하면 출퇴근하고 싶다는 것이 내 소망의 하나였다. 그러나 20년 이상 공백이 있는데다 사오정을 넘어 오륙도에 이른 사람에게 문 열어줄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오직 한겨레만 떠올랐는데, 한겨레는 선뜻 나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한겨레에 대한 나의 애정과 친화력이 내가 출퇴근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와 통일의 열망을 안고 기적처럼 만들어진 시민역량의 상징 한겨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사회를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 산적한 국민주 신문이기 때문이다. 신문이 그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듯이, 한겨레의 건강성이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겨레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와 동떨어진 국민의 성금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관철되는 시장에서 경쟁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정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실제로, 한겨레 구성원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와 진보의 선봉에 선다는 자부심과 긍지만으로 약육강식의 냉혹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모한 신념’에 도전했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전투장비 없이 ‘전의’ 하나만으로 전장에서 승리해야 하는 병사의 처지와도 같은 것이다.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박봉을 감수해온 한겨레 성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퇴직금 출자전환이라는 ‘벼룩의 간’까지 동원해야 하는 비상조치도 취해야 했다. 한겨레가 이렇게 어렵사리 자본과 시장에 맞서고 있는 동안 사회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끝났다는 인식이 사회전반에 자리 잡았고, 그것은 한겨레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경계는 우리가 다가갈수록 저 멀리 물러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동안의 독재정권의 경험이 기준이 된 탓인지 사회 구성원들은 절차적 민주화의 성취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긴장을 늦추었다. 한겨레가 할 일은 오히려 이제부터인데, 한겨레에서 시선을 거두기도 했다. 모두 한겨레도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한편 한겨레의 취약한 경쟁력은 한겨레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한겨레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위한 소명을 안고 태어난 신문이라고 할 때, 이 땅의 자본과 돈은 애당초 ‘정의’에 친화적이기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소유’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면서 이에 영합하는 신문일수록 주류가 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물신주의와 긴장하면서 ‘존재’에 대해 성찰하기를 바라는 신문은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주 신문이 기댈 곳은 성숙된 의식을 가진 시민들밖에 없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시민의식과 자발적 참여, 그것만이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런 마음 하나하나가 ‘희망의 거처’들이다. 볼테르의 말을 다시 음미해본다.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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