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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1 17:17 수정 : 2005.09.01 17:41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미디어전망대 - 전규찬

해방 전후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서니 조선놈 조심하여라”라는 예언동요 성격의 경구가 널리 퍼졌다. 인터넷 한 지식검색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횡횡하던 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이 강대국들의 조악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한 단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몇 년 전 기자 도올도 “해방 직후 이 땅의 뭇 백성”의 외침이라고 풀이했던 기억이 난다. <한겨레>에서도 ‘민중의 본능적 외침’이라는 해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이런 기억의 뿌리가 사실과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강준식의 <적과 동지>라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소설에는 해방 직전 총독부가 헌병대 등과 작당해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 노래를 시중에 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컨대 우리가 아닌 그들이 의도한, 분열과 협박 공작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상식과 어긋나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강만길, 송건호, 최장집, 리영희와 같은 쟁쟁한 선생들이 추천사를 쓴 걸로 봐서 근거 없는 낭설, 소설적 허구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일반의 기억과 실제 기록은 다를 수 있다. 무지의 소치이건 체계적 왜곡과 조작의 탓이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 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투적 지식, 즉 상식을 깨는 구체적이고 성찰적인 역사 글쓰기 작업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다. 오류 시정과 진상 규명의 노력을 통해 허술한 과거 기억을 정확한 역사기록으로 바꿔놓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투명한 현실과 합리적인 진보가 가능해진다. 반복을 통해 자동화된 믿음체계, 즉 신화와 이데올로기는 진리와 진실에 치명적이다.

‘민족지’라는 상투어만 해도 그렇다. 20년대 사회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유행처럼 불어왔을 때, <조선일보> 등에는 ‘맑스 보이’들이 득실댔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수사가 덩달아 지면에 넘쳐났다. 그런 시기의 신문들이 일정하게 민족적 톤을 보였던 게 과연 놀라운 일일까? ‘독립’이라는 단어를 분명 일제가 불온시했을텐데, 독립문은 막상 온전하게 현존한다. 누구로부터의 ‘독립’이고 누구를 위한 ‘민족’인지가 중요하지, 단어 자체가 자동적으로 식민에 대한 거역, 제국에 대한 항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30, 40년대에 들어 이 땅의 신문들은 조선이 아닌 일본을 유일 ‘민족’으로 승인했다. 친일로의 본격적 변절이다. 사주들이 다투어 각종 연맹에 참여하거나 ‘시국강연’에 나섰다. 기고문을 통해 ‘제국의 일분자’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그래서 “보람있게 죽자”는 최남선의 선동에 <동아일보> 김성수는 교육자의 양심 운운하며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화답한다. <조선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안재홍은 “대동아 성전을 계기로 이 위대한 역사적 무대에 황국신민의 일분자로 스스로 총검을 들고 나서게 된 것은 실로 감개무량”하다고 설파한다. “성전의 용사로 부름 받은” 학도는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이오 생로, 일억국민의 기쁨과 감사”라고 떠벌린 향산광랑, 이광수의 시구 그대로다. 친일을 넘어선 전체주의 선전일색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민족지를 자처한 과거 사주들을 친일인사로 분류한 것은 이런 기록에 비춰볼 때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해방 이후 친일에서 재차 반공으로 변신한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마땅한 평가다. 진짜기록이 가짜기억에 의해 영원히 가려질 수는 없다. 기록은 기억을 꿰뚫고 나온다. 그러면서 새롭고 참된 집단기억을 만들어낸다. 대체 누가 이 해방의 작업을 방해하려는가? 왜, 무슨 이유로?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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